백제시대에는 복홀군(伏忽郡)에, 신라시대에는 보성군(寶城郡)에, 조선시대에는 순천군(順天郡)에 속하였다. 1896년에는 나주부(羅州俯)에 속하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보성군 율어면(寶城郡 栗於面)이라 개칭하였고 면소재지를 율어리(栗於里)에 두었으나 6·25이후 문양리(文陽里)로 옮겼다. 문헌상의 기록은 없으나 예부터 밤(栗)이 많아 속칭 “밤어면”의 한자음(漢字音)인 율어면(栗於面)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구전(口傳)이 있으나 지금은 밤이 별로 많지 않다.
율변(栗邊) : 율어면 율어리
율변마을은 고려말에 우정(牛汀)에서 거주하던 진주강씨(晋州姜氏)가 새로 터를 잡아 이주해 와서 마을이 형성되었으나 현재는 여산송(礪山宋)씨와 함양박(咸陽朴)씨가 주로 거주하고 있다. 이 마을의 지명은 마을 뒷산에 밤나무가 울창하고 호수가 있어서 율호(栗湖)리라 부르다가 조선말에 율변(栗邊)리라 부르라고 개칭 하였는데 이는 율어면의 지형이 밤처럼 생겼으며 이 마을은 밤의 갓에 해당된다 하여 율변이라 이름지었다 한다.
우정(牛汀) : 율어면 율어리
우정마을은 고려초에 지주강(晋州姜)씨가 터를 잡아 마을을 형성 하였으며 지금은 여산송(礪山宋)씨와 남평문(南平文)씨가 주로 살고 있다. 마을의 이름은 옛 도승이 터를 잡을 때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산의 뻗어 내림이 소가 물가에 드러누워 있는 와우형국(臥牛形局)이라하여 지금의 우정(牛汀)이라고 불러지고 있다.
진천(眞泉) : 율어면 율어리
진천마을의 형성은 임진왜란 후 경상도 고성에서 살았다는 칠원제(漆原諸)씨가 처음 터를 잡고 살면서 남평문씨와 결혼을 하였는데 그후 제씨는 모두 떠나고 남평문(南平文)씨와 기타 성씨가 마을을 이루고 있다. 마을 이름은 어사 박문수(朴文秀)가 암행도중 이 마을을 지나다가 목이 말라 마을 가운데 있는 샘물을 먹고 물맛이 너무 좋아 진천(眞泉)이라 하였다하여 그후 마을 이름을 진천이라 하고 있으며 참샘이라 부르기도 한다.
자모(慈母) : 율어면 율어리
자모마을은 고려중엽 해주오(海州吳)씨가 터를 잡고 마을을 형성 하였으나 조선시대에 병자호란으로 오씨가 망한후에 장흥임(長興任)씨 국담공(菊潭公)이 입향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자자일촌을 이루고 있다. 1985년 1월 20일 주암 다목적댐공사로 인하여 수몰지역으로 고시되어 현재는 7가구가 이주했으며 17가구가 간접보상을 받게되어 대대로 형성되었던 자자일촌이 아쉬움만 남긴채 옛 이야기가 되고 있다. 마을이름은 옛날 도승이 산세를 보고 터를 잡았는데 풍수리리설에 의하면 산의 형세가 여성의 유방과 같은 아름답게 형성된 쌍유혈(雙乳穴)로 이루러져 있고 현모 양처의 지덕을 겸비한 어린 아이의 어머니가 아들을 품고 젖을 주는 자태라 하여 마을이름은 자모(慈母)라 칭하였다고 한다.
진목(眞木) : 율어면 율어리
진목마을 조선중엽에 해남윤(海南尹)씨가 터를 잡고 살아 오면서 마을이 형성 되었다. 마을의 지명은 마을앞 산의 형세가 참나무를 찍어 먹는 탕목조 형국이어서 새의 먹이를 일컬어 진목(眞木)이라 했다 한다.
상빙(上氷) : 율어면 금천리
상빙마을은 350여년 전에 김해김씨(金海金氏)가 처음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마을의 지명을 부락의 형태가 금자형(金字形)이고 또 김씨마을이라고 하여 금화리(金化里)라고 했다 하며 그후 마을앞에 흐르는 냇물이 매우차서 웃빙내라고 하였는데 한자음 표기로 상빙(上氷)이라 불러지고 있다.
하빙(下氷) : 율어면 금천리
하빙마을의 형성시기는 상고할 수 없으나 조선조 중엽부터 부락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마을의 이름은 이 마을위치가 배산도천(背山渡川)하여 있고 동구에 죽림이 무성하며 초암산 지문 기슭에서 발원된 유수가 거울같이 맑고 차갑다해서 속칭 빙내(氷川)라 했다고 전해내려 오고 있다.
광천(光川) : 율어면 율어리
광천 마을은 지금부터 200여년전 상빙에서 거주하던 김만호의 사위인 오중관이 풍수지리에 뛰어난 국풍을 초빙해 집터를 잡고 거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이름은 뒷산의 매봉을 등지고 초암산을 바라보는 정남향 부락으로 존제산에서 발원된 물이 풍부하여 종일 햇빛에 반짝이며 부락을 비추어 준다고 하여 광천(光川)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석천(石川) : 율어면 금천리
석천마을은 250여년전에 조씨(曺氏)가 터를 잡고 살아 오다 현재는 남평문(南平文)씨 김해김(金海金)씨가 마을을 이루고 있다. 마을 이름은 조씨(曺氏)가 큰 바위사이에 터를 잡고 살았다하여 돌틈이라 칭하였으며 마을앞에 큰 시냇물이 흘러 석천이라 하였다고 한다.
모암(帽岩) : 율어면 선암리
선암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상선리, 하선리, 모암리를 병합하여 상선과 모암리의 이름을 따서 선암리라 한다. 모암마을은 약500년전에 인동장씨가 터를 잡아 6대째 살아오다 흩어지고 그후 하동정씨가 6대, 청풍김씨가 4대째 살고 있는 곳으로 율어면에서는 제일 높은 곳에 촌락을 형성하고 있다. 이 마을의 이름은 앞산에는 신부바위가 있고 뒷산에는 신랑바위가 있고 서로 마주보고 있다하여 모암이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상선(上船) : 율어면 상선리
상선마을은 조선중기에 하동정(河東鄭)씨가 의식(衣食)이 풍성할 것이라 하여 이곳에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마을의 이름은 산의 형세가 앞산은 뱃머리와 같고 뒷산은 배들과 같은 형국이라 해서 선창이라 불러 오가다 행정구역 개편시 상선이라 개칭하였다.
하선(下船) : 율어면 선암리
하선 마을은 조선중기에 밀양 박(朴)씨가 처음 터를 잡아 마을을 형성하였다 마을의 이름은 산의 형세가 앞산은 뱃머리와 같고 뒷산은 배들과 같은 형국이라 해서 선창이라고 불러오다가 행정구역 개편시 윗마을은 상선 아랫마을은 하선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팽목(彭木) : 율어면 선암리
팽목 마을은 조선 중엽 밀양손씨가 터를 잡아 살아왔으며, 마을의 이름은 마을 옆산에 황새가 무리를 지어 살면서 나무를 쪼았다고 하여 탁목이라 하였다가 복내와 조성을 왕래하던 상인들이 마을 입구의 큰 팽나무 그늘에서 쉬었다 가곤 하여 마을 이름이 상인들이 휴식처 제공으로 팽목이라 개칭되어 불러지고 있다.
신기(新基) : 율어면 선암리
신기마을은 약 150년 전에 하동정씨가 터를 잡아 마을을 형성 하였으며, 마을의 이름은 상선마을의 터밖이라 하여 오다가 행정구역 개편시 새로운 마을이라하여 신기라 하였다 한다.
상율(上栗) : 율어면 문양리
율어면을 밤어면이라고 칭하는데 밤어면을 아랫밤어 웃밤어라고 하며 율어1구 울변에 일제때 면사무소가 위치하고 있어 아랫밤어라 하였고, 해방후 면사무소 소재지가 문양리 상율 부락으로 옮겨지면서 웃밤어라 하여 상율이라 하였다. 또한 산의 형세가 밤의 윗부분에 위치한다해서 상율이라 했다고 한다.
대치(大峙) : 율어면 문양리
대치 마을은 고려말 1300년경 탐진최(耽津崔)씨가 먼저 터를 잡은 후 김해김(金海金)씨가 들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한다. 1960년대까지는 10대 성씨에 33호로 번창하였으나 지금은 20여호가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마을의 이름은 마을 뒷산에 문덕면 한치 부락으로 넘어가는 큰 재가 있는데 큰 재밑에 마을이 있다하여 한치부락이라 이름하였으며 한치부락의 이름은 大宇의 넓다 크다의 뜻을 지녔기에 한치를 대치(大峙)라 하였다 한다.
나문(羅文) : 율어면 문양리
나문마을은 1800년경에 광주이(光州李)씨와 여산송(廬山宋)씨가 터를 잡아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이름은 마을 앞에 갈마봉이 있고 오천수가 구비쳐 아름다운 비단과 같은 형태로 흐르고 있어 나문(羅文)이라 했다 한다.
가척(可尺) : 율어면 문양리
문양리는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치리, 나문리, 양지리, 마산리, 가척리,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나문과 양지의 마을을 따라 문양리라 하였으며 가척마을은 조선 효종 때 고령신(高靈申)씨가 마을 앞의 넓은 들을 보고 터를 잡았다고 하며 그후 신씨의 외손인 전주이(全州李)씨가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마을 이름은 마을 뒤산 옥녀가 길쌈을 하면서 비단을 자로 재는 형국처럼 생겼다하여 가척(可尺)이라 한다고 한다.
양지(陽地) : 율어면 문양리
양지마을은 달성서(達成徐)씨가 1710년경에 터를 잡아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하나 지석묘 군집으로 보아 마을이 선사 시대로부터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현재는 장흥임(長興任)씨와 광주이(光州李)씨가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마을 이름은 옛날에 마을 앞으로 시냇물이 흘러 갈때는 12개 마을이 형성되었다하나 그후 천재지변으로 하천이 새로 생겨 시냇물이 흘러간후 11개 마을은 이주하고 양지촌만 남았다한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마을 뒷산이 버드나무가지 형으로 산세가 내려와서 양지(陽地)마을이라 하였으며 또한 마을이 무척 따뜻하다하여 양지(陽地)라 불러지고 있다.
마산(馬山) : 율어면 문양리
마산마을은 조선중엽에 인근에 살던 전주이(全州李)씨가 지세가 좋고 앞에 노정봉(露楨峰)이 있어 집을 짓고 살면 좋을 것 같아 터를 잡아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마을 이름은 앞산 모양이 말과 같고 마을은 말을 메어두는 말뚝과 같다고 하여 말뫼라 하다가 한자음인 마산(馬山)이라고 불렀다 한다.
칠음(七音) : 율어면 칠음리
칠음마을은 고려초기에 보성선(寶城宣)씨가 이곳을 지나다 뒷산 산세가 솔개가 알을 낳은 형태라 하여 이곳에 터를 잡으면 자손이 번창하고 인물이 많이 배출 된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촌락을 형성하여 살다가 그 후세가 약해져 1890년부터 광주이(光州李)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으며 1906년에 부락 전호가 대화재(大火災)로 전소(全燒)된 후 다시 재기하여 각성 20여호가 정착하고 있다. 마을의 이름은 마을 뒷산이 솔개모양이라 하여 솔개치(鴟)子와 수풀림(林) 字음을 따라서 치림(鴟林)이라 하였고 선조들은 갈음촌(渴音村)이라고도 칭하였는데 일제시대에는 7가지의 유명한 명성이 날 것이라고 하여 현재의 칠음(七音)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전해진다.
대평(大平) : 율어면 칠음리
대평마을은 1890년경 진원박(珍原朴)씨가 터를 잡고 마을의 이름은 진원 박응장(朴應張)이 1845년 무과에 등과하여 강진군수로 재직하면서 대판동(大販洞)이라 하였으며 밀양박홍주(密陽朴洪柱)가 홍문관교리(弘文館敎理)를 지내면서 태평동(太平洞)으로 개칭하였고 행방후는 대평(大平)으로 불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상일(上日) : 율어면 칠음리
상일마을은 고려중엽 탐진최(耽進崔)씨 춘길(春吉)이 함평 손불에서 이곳으로 들어와 진원박(珍原朴)씨 딸을 맞이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 마을의 이름은 병자호란때 여든살먹은 어머니를 등에 업고 피난을 가는데 숲속에서 이상한 새소리가 나서 가만히 가 보았더니 아낙네가 베를 짤 때 나는 소리였다. 그 소리로 잃어버린 마음을 찾았다하여 마을 이름을 잃어실이라고 부르다고 일제때 상일이라 하였다.
하일(下日) : 율어면 칠음리
하일 마을은 고려말엽 탐진최(耽進崔)씨 길만(吉萬)씨가 상일에서 내려와 마을을 형성하였다 한다. 마을의 이름은 상일(上日)과 같이 잃어실이라 부르다가 일제때부터 두 마을을 나누어서 상일(웃잃어실) 하일(아래잃어실)로 부르고 있다.
고음(古音) : 율어면 고죽리
고음(古音) 마을은 15세기 말엽에 인동장(仁東張)씨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 마을 입구 서쪽 산이 곰이 엎드린 형국이라 곰복으로 불렀으면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고음(古音)이라 하였다.
죽포(竹苞) : 율어면 칠음리
1800녀대에 최(崔)씨가 처음 터를 잡았으나 모두 떠나고 1900년대 칠원제(漆原諸)씨, 장흥임(長興任)씨등이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이름은 마을이 배의 형상인데 배에서 삿대가 필수이므로 마을주변에 삿대용 죽(竹)이 많았으며 그 모습이 마치 꾸러미처럼 보인다 하여 죽포(竹苞)라는 설과 전설에 의해 죽포 안산에 제(諸)씨 선산이 파리형국이라 대승촌이라 했고 그후 부락뒷산 미등이 동과산이 유하므로 봉조미계에 죽순을 먹고 산다하여 죽포라 했다는 설이 있다.
배골(梨洞) : 율어면 이동리
배골마을의 형성연대는 상고할 수 없으나 고려말엽 밀양박씨가 처음 마을을 형성하였다 한다. 마을의 이름은 마을 뒷산 형제봉(兄第峰)에서 내려다 보면 마을이 “배”모양으로 생겨 배舟洞이라 했다 하며 지금의 이동(梨洞)이라 부르게 된 것은 고증(考證) 할 수는 없으나 “배 舟”자와 “배 梨”자가 의미는 다르지만 발음이 동일(同一) 한데서 유래(由來) 되었다 한다.
대동(大洞) : 율어면 이동리
대동마을은 고려시대부터 탐진최씨 나주임씨 등 200여호가 지금의 대동제(大洞堤) 부근에 마을을 형성 거주하였으나 마을이 폐촌이 되면서 잔여 가구가 지금의 대동(大洞) 마을로 옮겨 현재는 장흥임씨, 기계유씨, 이천서씨 등 각성 17호가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마을의 이름은 동네가 어찌나 큰지 한골이라 부르다가 1880년경 풍수리설에 마을터가 좋지 않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현재의 대동으로 옮겨 옛 한골을 대동으로 부르고 있다.
가정(可亭) : 율어면 이동리
가정마을은 조선조중엽부터 나주임(林)씨가 12대를 이어 살고 있으며 그후 연대는 추정할 수 없으나 각성 20여호가 촌락을 형성하고 있다. 마을의 이름은 형국이 가재와 같이 생겼다고 하여 “가재이”라 부르다가 지금의 가쟁이로 구전되어 오고 있다.
서상(西上) : 율어면 이동리
서상마을은 고려중엽에 철원제(澈原諸)씨가 마을을 형성하였다. 마을의 이름을 고려중엽에 사찰이 있어서 불당동이라 했다가 위쪽으로 마을이 새로 형성됨에 따라 중간에 있다고 하여 중촌이라 했으며 현재는 동쪽에도 마을이 형성되어 방향에 근거를 두고 서상이라 했다고 한다.
서하(西下) : 율어면 이동리
서하마을은 고려중엽에 진주정(晋州鄭)씨가 터를 잡아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며 한때는 5개마을로 나누어져 있었으나 서하마을 만이 남아있다. 마을의 이름은 근처에 장군대 좌형의 명당이 있는데 그곳이 장군앞에 세운 깃발과 같다하여 깃발리라 불러오다가 기정(旗亭)이라 하였으며 그 후 서하로 바꾸었다 한다.
유천(柳川) : 율어면 유신리
유천마을은 1600년경에 진원박(珍原朴)씨가 장흥서 이주하였고, 창녕조(昌寧曺)씨가 조성면 고절등에서 이주해서 부락을 형성하였다. 마을의 이름은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마을이 배형국이라고 하며 마을을 중심해서 좌우로 시냇물이 흐르고, 마을을 접해서 공동우물이 있으며, 우물가로 흐르는 시내가 있는데 그 주위로 옛날에 수양버들 나무가 많이 있어 버들내라 불렀다가 한자음으로 따서 유천이라고 불렀다 한다.
신산(新山) : 율어면 유신리
신산마을은 고려초에 하동정(河東鄭)씨가 터를 잡았다 하나 현재는 창녕조(曺)씨와 밀양박(朴)씨가 부락을 형성하고 있다. 마을의 이름은 마을 뒷산 모양이 새 형태와 같다하여 금산(禽山)이라 하였는데 그 후 봄이면 산에 진달래 꽃이 만개하여 마치 비단 폭 같이 아름다워 금산(錦山)이라 하였다 하며, 또 화산(花山)이라 부르다가 현재는 신산(新山)으로 부르고 있다 한다.
용암(龍岩) : 율어면 유신리
용암마을은 고려중엽에 벌교 낙안에서 진주강(晋州姜)씨가 처음 터를 잡아 살다 떠나가고 보성선(宣)씨와 천안전(全)씨가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이름은 마을 뒷산에 큰 바위가 있는데 그 형태가 마치 갓(冠)처럼 생겼다하여 갓바위라 하였다 하며 그후 일제시대에 편의상 용암이라하여 현재까지 일컬어지고 있는데 그전에는 입암(笠岩)이라하였기 때문에 옛날 지도에는 입암으로 나오고 있다 한다.
시목(枾木) : 율어면 유신리
시목 마을은 고려중엽에 장수황(長水黃)씨가 처음 정착 터를 잡고 살다가 조선말엽에 떠나고 그 후에 보성선(寶成宣)씨와 죽산안(竹山安)씨가 부락을 형성하고 있다. 마을 이름은 마을부근의 광천개미란 곳이 다른곳에 비해 유난히도 감나무가 무성하게 잘 자라고 고목들도 많아 감나무골이라 부르다가 일제시대에 시목이라 불렀다 한다.
장수(長水) : 율어면 장동리
장수마을은 고려중엽에 창녕조(昌寧曺)씨가 터를 잡아 살다가 현재는 광주이(廣州李)씨와 진원박(珍原朴)씨가 부락을 형성하고 있다. 마을 이름은 시냇물이 마을 뒷산 기슭에서부터 마을 앞까지 길게 흐른다 하여 장수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서동(書洞) : 율어면 장동리
서동 고려말엽에 천안전(天安全)씨가 처음 정착하여 살았으며 지금은 문화유(文化柳)씨와 칠원윤(七源尹)씨, 하동정(河東鄭)씨가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마을이름은 옛날 유명한 서당(書堂)이 있어서 서동이라 불렀다고 전해져 오고 있다.
수내(水內) : 율어면 장동리
수내마을은 1915년경 광주이(廣州李)씨 덕수(德水)가 터를 잡아 부락을 형성 하였다한다. 마을 이름은 옛날 하천이 있어 시냇물이 흘렀는데 물길을 바꾸고 거기에다 논을 만들어 수내들이라 불렀으며 도중에 마을이 형성되자 마을 이름을 수내라고 불렀다.
중촌(中村) : 율어면 장동리
중촌마을은 고려말엽에 창령조(昌寧曺)씨가 터를 잡아 마을을 형성하였다. 마을 이름은 장수마을과 들판사이에 있는 마을이어서 중촌이라고 불렀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