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옥녀봉반(玉女峰盤)에 비안함노(飛雁含蘆)의 명혈이 있다는 대로동촌(大蘆洞村)이라는 부락(가리실,蘆洞)이 있었는데 이 부락을 중심으로 “蘆花十里不見盧 可活萬人 金龜月林之間平原廣里 近水邊地 ” 찾아 취락이 형성되어 노동(蘆洞)이라는 명칭이 붙게 되었다.
꽃밭등(花田) : 노동면 광곡리
화전마을은 1800년경 칠원윤(漆原尹)씨가 입촌하여 처음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1959년 면청사가 명봉리에서 이곳으로 이전 세워짐으로써 면소재지로 터를 잡게 되었으며 면 각급 기관의 청사가 위치하고 있다. 마을의 지명은 옆산이 고기의 눈과 같다 하여 어목(魚目) 댕이라 불리었으나 1960년 이후 앞산이 꽃으로 둘러싸인 밭등성이 같다 하여 꽃밭등(花田)이라 불리고 있다.
광탱이(廣花) : 노동면 광곡리
광곡리는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광탄리(廣灘)와 탄곡리(彈谷)를 합하여 광곡리라 하였다. 광화(廣花) 마을은 1600년경에 진주강(晋州姜)씨가 보성강 유역의 비옥한 토지를 보고 입촌하여 마을을 이루고 살았으며 1700년경에는 이천서(利川徐)씨와 조양임(兆陽林)씨, 낭주최(郎州崔)씨가 차례로 들어와 성촌되었다. 마을의 지명은 넓은 들에 보성강 물이 도도히 흐르고 있어 광탄(廣灘)이라 칭하였는데 이곳이 화순등지로 통하는 길목으로 이곳을 지나는 사람이나 다른 사람들이 이 마을은 인심이 험하고 주민들이 억세다하여 “광탱이”라 블렀다 한다. 그러나 부락명 어감을 좋지 않게 느낀 주민들이 광탄(廣灘)의 “廣”자와 뒷산 화전봉(花田峰)의 “花”자를 따서 1961년 이후 광화(廣花)로 부락 이름을 개칭하였다.
보림(寶林) : 노동면 광곡리
보림 마을은 1940년경에 낭주최(郎州崔)씨가 터를 잡고 살았으며 1950년도에 조양임(兆陽林)씨 등이 입촌하여 현재 마을을 이루었다. 마을 지명은 마을에 큰 부자가 살았다 하여 장자동(長子洞)으로 불리어 오다가, 원래 이곳에 후백제 시대 보림사(寶林寺)라는 절이있었다 하여 보림(寶林) 부락으로 개칭하여 부르고 있다.
탕실(彈谷) : 노동면 광곡리
탕실마을은 전주이(全州李)씨 효령대군(孝寧大君) 9대손 이도동(李道東)이 경기도 가평에서 벼슬길의 매부를 따라 강진 도암면에서 거주타 별세함으로 그의 처 윤씨가 아들 3형제를 데리고 산세좋은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지명은 마을 뒷산이 청용백호형(靑龍白虎型)으로 우뚝솟아 탄금(彈琴)으로 불리웠으나 지형이 옥녀탄금(玉女彈琴)의 명혈이라 하여 탄곡(彈谷)으로 개칭하였다.
한재(大峙) : 노동면 대련리
대련리(大蓮里)는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무사리(無事里) 적련리(摘蓮里)와 대치리(大峙里) 구룡리(九龍里) 일부와 옥암면(玉岩面)의 상청리(上靑里)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대련리(大蓮里)라 하였다. 대치마을은 고려초에 제주양(濟州梁)씨가 한재 동북쪽에 있는 샘골에 마을을 형성하여 살다가 흩어지고 16세기 중엽 진원박(珍原朴)씨 수규 (守圭)가 보성읍 청룡(靑龍)에서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다 한다. 마을지명은 대련리에서 보성읍으로 가는 큰 고개가 있는데 큰 고개 이름을 대치령(大峙嶺)이라고 하며 고개 이름을 따 한재 또는 대치(大峙)라 부르게 되었다.
무생이(無事) : 노동면 대련리
무사마을은 1580년경에 광주이(光州李)씨가 처음 입촌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이름은 옛날 어떤 대사가 이곳을 지나가다 마을 앞산이 말(馬) 음지의 형국이라 하여 “몰음지”라고 불렀는데, 조선조 중종(中宗) 임금의 측근 한분이 이곳으로 유배를 와서 은거하게 되었는데 마을이 워낙 산중이고 사람들도 다니지 않는다 하여 “아무도 모르는 곳”이라는 뜻을 한자음으로 표기하여 무사(無事)라고 칭하였다.
적연골(摘蓮) : 노동면 대련리
적연골마을은 17세기 중엽 수원백(水源白)씨 문호공(文虎公)이 장흥에서 분가 입촌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마을의 지명은 이곳에 연화도수(蓮花到水)의 명혈이 있다하여 적연(摘蓮)이라 하였으며, 지금도 이곳 고치실 저수지에서는 해마다 붉은 연꽃이 만발하여 적련(赤蓮)이라고도 표기되고 있다.
장자(長子) : 노동면 대련리
장자 마을은 1960년대에 산을 개간하고 산을 돌봐주는 사람들이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전 가구가 독립 가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마을의 지명은 적련골 동남쪽에 위치한 장자골이 있는데 이 골짜기의 산과 들이 장자(부자)들의 소유였기에 장자동(長子洞)이라 칭하였다.
영신(靈新) : 노동면 감정리
감정리는 마을 한 가운데 맑고 시원한 큰샘이 있다하여 감정(甘井) 또는 감정동(甘井洞)이라 불리어 오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영신리(靈新里)와 감정(甘井)을 병합하여 감정리(甘井里)라 하였다. 영신(靈新) 마을은 17세기 중엽에 밀양손(密陽孫)씨 영구파(靈龜派)가 분가 이곳에 새로터를 잡아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지명은 밀양손씨가 새로 터를 잡았다 하여 처음에는 “새터”라 불러오다 뒤에 영신(靈新)이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
하감정(下甘井) : 노동면 감정리
하감정 마을은 1730년경에 진원박(珍原朴)씨가 들어와 살면서 마을을 형성하였다. 마을의 이름은 마을 한가운데 우물이 있는데 물이 유달리 달고 맛이 좋아 감정동(甘井洞)이라 불러오다가 영신(靈新)의 아랫마을이라 하여 1960년 이후부터 하감정(下甘井)으로 부르고 있다. 하감정의 우물은 현재까지도 부락민의 식수원이 되고 있다.
돈다(敦多) : 노동면 금호리
돈다마을은 13세기 중엽에 박씨(朴氏)성을 가진 사람이 터를 잡고 살면서 5형제를 두었으나 차츰 흩어지고 그후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밀양손(密陽孫)씨가 입촌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마을의 지명은 마을 뒷산이 금성산(金星山)과 황추봉(黃秋峰)으로 둘러 쌓여 있고 개촌(開村)하였던 朴氏 5형제가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하였다 하여 돈다(敦多)라고 불러졌다.
다애(代如) : 노동면 금호리
금호리는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돈다리와 대여리 영구리의 각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금성산(도산천) 밑 보성강가가 되므로 금호리(錦湖里)라 하였다. 다애 마을은 고려말 수주(樹州) 목사 손책(孫策)의 부인 원주이(原州李)씨가 조선 세종(世宗) 4년(1421년)에 난세를 피해 아들 3형제를 데리고와 이곳에 터를 잡고 살면서 큰아들 손검경(孫儉敬)은 나주로 셋째 손계경(孫季敬)은 전라북도 정읍으로 각각 이거케 하고 둘째아들인 밀직부사(密直副使) 손유경(孫有敬)과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이 마을의 지명은, 밀직부사 손유경의 모친 원주이씨가 지리(地理)에 능한 분으로 자손이 벼슬도 하지말고, 난세에 휩쓸리지도 말며, 화목하고 굳굳하게 살 수 있는 터로 이곳에 “대대승승지지(代代承承之地)임을 미리 알고 촌명을 대대(代代)로 한결같이 살으라는 뜻으로 대여(代如)라 하였다 한다.
방죽안(築內) : 노동면 금호리
축내마을은 대여마을을 형성한 손유경(孫有敬)의 아들이 분가하여 마을을 형성한 이래로 밀양손씨가 대대로 집성촌하고 있으며 한때 15가구 이상 거주하였으나 서울 등 외지로 뿔뿔이 흩어져 밀양손씨 4가구 및 최근에 들어온 성주이(星州李)씨와 인동장(仁同張)씨등 6가구만이 살고 있다. 마을의 이름은 마을앞에 몽리면적 약 20ha의 저수지가 있는데 저수지 안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방죽안” 또는 한자 표기로 축내(築內)라 부르고 있다.
영구(寧龜) : 노동면 금호리
영구마을은 대여(代如)에 살던 손유경(孫有敬)의 자손이 새 터전을 잡아 마을을 형성하였다. 마을의 지명은 대여 동북쪽의 등성이에 위치한 마을로 등성이에 띠가 많았다 하여 처음에는 “띠밭등” 이라고 부르다가 마을 앞에 영당(고려 태조때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삼중대광 광리군(三重大匡 廣理君) 밀양 손긍훈(孫兢訓)의 영정을 모신 곳)과 구암(龜岩:거북형 상의 큰 바위)이 있는데 영당의 “영”자와 구암의 “구”자를 따서 영구(寧龜)라 칭하게 되었다.
배남정(梨亭) : 노동면 금호리
이정 마을은 대여(代如)마을을 형성했던 손유경의 11대손 중효(仲孝)가 분가하여 마을을 이루었다. 이 마을의 지명은 마을앞에 배나무 정자가 있었으므로 이정(梨亭)이라 부르고 있으며 옛날 어느 스님이 정자에 바랑을 걸어 놓고 갔다는 전설에 의하여 배남정이라고도 한다.
마산골(馬山) : 노동면 옥마리
옥마리는 본래 보성군 노동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월림리, 벽옥리, 마산리, 신점리와 대여리, 영구리의 각 일부와 장흥군 장평면의 금동리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벽옥(碧玉)과 마산(馬山)의 이름을 따서 옥마리(玉馬里)라 하였다. 마산부락은 서기 1480년에 대여(代如) 손유경(孫有敬)의 6대손 여양(汝陽)의 자 명윤(明胤)이 분가하면서 이곳에 터를 잡아 현재까지 11대 손이 거주하는 손씨 집성촌이다. 이 마을의 지명은 마을 뒷산이 말(馬)의 형국이라 하여 마산(馬山)이라고 칭하였다 한다.
벽옥(碧玉) : 노동면 옥마리
벽옥마을은 진주정씨(晋州鄭氏)가 맨 먼저 이 마을에 터를 잡았다고 전해지나 1790년경 하동정(河東鄭)씨 진원박(珍原朴)씨가 들어와서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 이 마을의 이름은 마을 뒤에 울창하고 돌이 많은 벽옥산(碧玉山)이 있는데 벽옥산에 옥녀봉반(玉女峰盤)이 있다는 풍수지리설에 의해 산명을 따서 벽옥(碧玉)이라 칭하였다.
용소(龍沼) : 노동면 옥마리
용소마을은 1930년대부터 창녕조(昌寧曺)씨가 입촌하여 옹기그릇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 마을의 이름은 큰비가 오면 물이 솟아 용(龍)이 승천하였다하여 용소(龍沼)라 하였으며 옹기그릇을 생산해 점촌(店村) 점등으로 불리어 지기도 한다.
봇들(孝子) : 노동면 옥마리
효자 마을은 밀양박(密陽朴)씨가 터를 잡아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 마을 지명은 장리보(長利洑)의 들에 위치하였다 하여 “봇들”이라 칭하였으나 이 마을에 거주하는 박성구(朴成球)라는 사람이 효친경애(孝親敬愛)의 정신을 살리기위해 효자동(孝子洞)이라 명명 하였다고 정해진다.
대고개(竹峴) : 노동면 용호리
죽현마을은 1840년에 겸백면(兼白面) 사곡에서 진원박(珍原朴)씨가 이곳으로 이거하여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현재 5대손이 살고 있다. 마을의 이름은 부락 앞산모양이 큰 가마솥과 큰 창고와 같은 형국이라 하여 “대고개(大庫開)”라 하였고 죽현은 대고개를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추측된다. 또 다른 지명으로 “조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조리등”. 조리가 쌀을 이는 형국이라고 해서 “미등”(米嶝) “주벅등”(주걱등)이라고도 불러졌다.
묘동(描洞) : 노동면 용호리
묘동마을은 1650년대에 흥덕장(興德張)씨가 거석리(擧石里)에서 분가하여 이곳에 터를 잡아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 마을의 이름은, 이곳이 연묘서산(連描鼠山)의 형국인데 이 지형의 이름을 따 묘동(描洞)이라 칭하게 되었다 한다.
오동(梧洞) : 노동면 용호리
오동 마을은 1380년경 청주한(淸州韓)씨가 입촌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이 마을의 이름은, 마을의 모습이 오동(梧洞)나무 형국으로 오동이라 칭하였으며 옛날에는 마을주위에 오동나무가 아주 번성하여 자랐다고 전해진다.
망골(龍洞) : 노동면 용호리
용동마을은 1740년경에 하동정(河東鄭)씨가 입촌하여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현재는 6가구의 하동정씨 외 5개 성씨가 각 1가구씩 모여 부락을 형성하고 있다. 마을의 이름은 1300년대에 마을 뒷산에 “망동사”(혹은 구용사)라는 절이 있어 “망골”이라 칭하였으나 그후 망동사 앞 연못에서 용이 승천하였다 하여 용동(龍洞)이라 개칭하였다고 한다.
수촌(藪村) : 노동면 용호리
용호리는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묘동리 오동리 수촌리와 지심리, 구룡리, 대치리의 각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용호리라 칭하였다. 이 마을은 맨 처음 밀양박(密陽朴)씨가 터를 잡아 거주하였는데 그후 죽산안(竹山安)씨 수원백(水原白)씨가 입촌하여 마을을 이루었으며 현재는 1780년대에 입촌한 탐진최(耽津崔)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이 마을의 지명은 원래 부락의 위치가 벽옥산(碧玉山)밑에 위치하고 있으며 부락이 형성되기 전에 숲이 많이 우거져 수촌(藪村)이라 칭하였고 주위에 개구리 형국의 “머구릿등”, 뱀 형국의 “사두봉”(巳頭峰) 동남쪽에는 한새(황새)형국의 “한새등”으로 둘러 싸여있다.
포라테(草田) : 노동면 용호리
초전마을은 1750년경에 통천최(通川崔)씨가 입촌 마을을 형성하였다. 이 마을의 지명은 초전(草田)에서 망골로 가는 파랏재 고개와 마을에 갈대가 무성하여 초전이라 불리었다하며 초분(草墳)을 하였던 초분골이 있고 “포라테” 또는 “파랏테”로 불려지고 있다.
구주(拘走) : 노동면 거석리
구주마을은 원래 흥덕장(興德張)씨가 터를 잡아 살아왔는데 1780년경에 김해김(金海金)씨가 입촌하여 살았으며 이곳에서 원거석 등지로 분가자손을 퍼뜨렸다. 마을의 이름은 마을뒤에 개머리와 같은 형국의 명당이 있다는 설에 의하여 원래 “구두”(拘頭)라 하였는데 그후 구주(拘走)라 개칭하였으며 쇠고리형이라 하여 “쇠고리”라고도 부르고 있다.
마천(馬川) : 노동면 거석리
마천마을은 1700년경에 흥덕장(興德張)씨의 관가(貫家)가 있었는데 그 후 해주오(海州吳)씨 옥천최(玉川崔)씨가 모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한다. 원래 이곳은 마을입구에 큰돌이 세워져 있어 “선돌거리”라고 불러져 왔는데 부락 뒷산의 형국이 천마봉(天馬峰) 같다 하여 산명을 따서 마천동(馬川洞)이라고 한다.
신의(申義) : 노동면 거석리
신의마을은 1550년경에 나주(羅州)에서 이사온 흥덕장(興德張)씨 “이무”(以武)의 자손이 분가하면서 이 마을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마을의 이름은 기러기가 갈대 잎을 입에 물고 날아오는 형국의 “비안함노”(飛雁含蘆) 명당 근처가 된다는 것으로 그 말이 옳다하여 신의(申義)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원거석(原擧石) : 노동면 거석리
거석리는 이곳에 들독(들돌)이 있다하여 들독거리 또는 거석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하 신의리 지심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거석리라 하였다. 원거석 마을은 1580년경에 흥덕장씨 이무(以武)의 자손이 분가하면서 이 마을에 터를 잡았다 하며 후에 옥천조(玉川趙)씨 김해김(金海金)씨가 들어와 성촌되었다. 이 마을의 이름은 이곳에 비안함노(飛雁含蘆)의 명당이 있다 하여 갈대마을이라는 뜻으로 가릿골(盧洞)이라 불렀으나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마을 사람들의 여름철 휴식처인 당산 등에 “들독”이 있어 한자 표기로 거석(擧石)이라 칭하였다. 특히 이곳은 면의 중심부에 위치하기 때문에 면 이름을 이곳의 이름을 때서 노동(蘆洞)이라고 하였다.
터등(基嶝) : 노동면 거석리
터등마을은 1550년도 나주에서 흥덕장(興德張)씨 이무(以武)가 입촌하여 마을을 형성하고 자손을 퍼뜨려 이웃 마을까지 이루었다고 한다. 마을의 이름은 벽옥산(碧玉山) 줄기가 쭉 뻗은 산등에 터를 잡았다고 하여 “터등” 또는 한자 표기로 “기둥(基嶝)” 이라 칭하였다.
지심(智審) : 노동면 거석리
지심 마을은 1400년경 무렵 지심사(智審寺)가 있었는데 이 절을 중심으로 김해김(金海金)씨가 입촌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마을의 이름은 지심사 터에 취락이 형성되었다 하여 “지심”이라 하였으며 지혜있고 마음씨 고운 사람들이 대대로 이어져 온다 해서 지심(智心)이라고 불러지기도 한다.
신흥(新興) : 노동면 신천리
신천리는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신흥리, 신기리, 천동리를 병합하여 신흥과 천동의 첫머리 글자를 따서 신천리라 하였다. 신흥마을은 1830년경에 남평문(南平文)씨와 죽산안(竹山安)씨가 입촌하여 마을을 이루어 현재에 이르렀다. 원래 이 마을은 1680년경 이곳에 세워진 신흥사(新興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그 사찰명을 따서 신흥(新興)이라 칭하였다.
새터(新基) : 노동면 신천리
새터마을은 1740년경에 추계추(秋溪秋)씨가 입촌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마을의 이름은 새터를 잡아 신생(新生)마을이라 하여 신흥동(新興洞)의 新字와 새터를 잡았다 하여 터기(基)자를 “새터”라고도 한다.
샘골(泉洞) : 노동면 신천리
샘골 마을은 임진왜란 당시 마을이 골짜기에 형성되어 좋은 피난처가 되므로 흥덕장(興德張)씨, 진원박(珍原朴)씨가 이곳으로 형성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마을의 지명은 마을 입구에 샘이 있는데 샘물이 아주 좋다고 하여 샘골 혹은 천동(泉洞)이라 칭하였다.
호미(虎尾) : 노동면 학동리
호미마을은 남평문(南平文)씨가 1859년경 신천리 신흥(新興)부락에서 분가하여 터를 잡았다고 전해진다. 원래 이 부락은 호랑이 꼬리가 복스럽게 생긴 형국으로 호미(虎尾)라 칭하였고 서자(庶子) 발복지라하여 서손이 입촌하면 부자가 된다고 한다.
갑동(甲洞) : 노동면 학동리
학동리는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학송리, 호미리, 삽화리, 갑동리를 병합하여 학송(鶴松)과 갑동(甲洞)의 이름을 따서 학동리라 하였다. 갑동마을은 1410년경 난을 피하여 모여든 피난민의 은거지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 이 마을의 이름은 원래 이곳이 명봉리(鳴鳳里) 봉등(鳳洞)에 살고 있는 봉(鳳)이 먹을 대나무 형국이라 하여 죽방(竹芳·竹坊)이라고 불렀는데 구한말 지번(地番)이 갑(甲)이라 하여 갑동(甲洞), 혹은 산이 사방으로 둘러싸인 가운데로 철길이 관통하였다 하여 갑동(甲洞)이라 칭하였다고 전해온다.
삽화(揷花) : 노동면 학동리
삽화마을은 1700년경 김해김씨(金海金氏) 성을 가진 사람이 지나다 지형을 보고 마을앞에 노적봉 형국의 산이 있어 이곳에 정착하면 부촌이 되겠다고 생각하고 이곳에 들어와 살면서 부락이 형성되었다 한다. 이 마을은 형제가 같은 과거에 합격하여 어사화(御賜花)를 꽂고 넘어올 형국이라 하여 삽화촌(揷花村)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덕정(德亭) : 노동면 학동리
덕정마을은 1930년경 보성~화순간 경계 지점인 예제터널이 뚫리면서 열차교행(交行) 관계로 명봉역(鳴鳳驛)이 이곳 학동리 93번지에 들어가게 되자 봉화(鳳化), 봉동(鳳洞)등 이웃에 살던 진원박(珍原朴)씨등 여러 성씨가 입촌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 마을의 이름은 1930년경 명봉역이 생긴 후 덕거리의 덕(德)자와 정거장의 정(停)을 합하여 덕정이라고 칭하였으며 “역간” 마을이라고도 하였다.
학송(鶴松) : 노동면 학동리
학송마을은 1740년대 한양조씨(漢陽趙氏)가 입촌하였다가 약 40년후 진원박씨(珍原朴氏) 농수가 입촌, 터를 잡고 마을을 형성하였다. 이 마을의 이름은 당초에는 이곳이 목마른 백학(白鶴)이 물을 찾아 나는 갈학음수(渴鶴飮水)라 하여 학골(鶴)이라 하였으나, 목마른 학(渴鶴)이 신선과 같이 춤을 춘다하여 학이 살려면 소나무와 물이 있어야 할것으로 생각하고 마을이름을 학송(鶴松)이라 고쳤으며 지금도 마을입구에는 연못을 만들어 언제나 물을 채워 놓는다고 한다.
봉동(鳳洞) : 노동면 명봉리
명봉리는 본래 노동면의 지역으로써 명봉산(군산천)밑이 되므로 명봉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봉화(鳳化)리를 병합하여 명봉리라 하였다. 봉동 마을의 형성은 1750년대에 미력면 반룡리에서 살던 진원박(珍原朴)씨 손자가 먼저 죽자 가운이 불길하여 세 터전을 구하다가 이곳이 봉(鳳)의 형국이라하여 4남 2녀를 데리고 입촌하여 형성되었다. 이 마을의 지명은 부락 뒷산의 모양이 솟봉형국이라 하여 부락명을 봉동(鳳洞)이라 하였다.
봉화(鳳化) : 노동면 명봉리
봉화마을은 1760년경에 봉동(鳳洞)을 이룬 완역당(玩易堂)의 사자(四子)의 중군(中君)이 분가 입촌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지명은 뒷산형국이 암봉형(鳳型)이라 하여 봉화(鳳化)라 칭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