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중엽(朝鮮中葉)까지 가천현(可川縣)에 속해 있다가 말엽(末葉)에 동복현(同福縣)에 편입되었다.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동복현(同福縣), 문전면(文田面)의 덕봉(德峰), 척치(尺峙), 옥채(玉釵), 장동(長洞), 백사(白沙), 단양(丹陽), 수월(水月), 가천(可川), 율리(栗里), 신운(新雲), 대운(大雲), 무탄(舞灘), 석동(石洞), 강각(江角), 상죽(上竹), 하죽(下竹), 외동(外洞), 외우(外牛), 내우(內牛), 중우(中牛), 곡천(曲川), 장산(獐山)의 22개리와 보성군(寶城郡) 봉덕면(鳳德面)의 부곡(富谷), 강변(江邊), 내동(內洞), 금천(錦川), 양지(陽地), 법화(法化), 대치(大峙), 동계(東溪), 내판(內板), 축치(축峙), 외교(外橋), 반송(盤松), 마치(馬峙), 반월(半月), 오리(梧里)의 15개리로 개편하여 문전면의 “문”(文)자와 봉덕면의 “덕”(德)자의 이름을 따서 “문덕면”(文德面)이라 개칭하였다. 1973년 7월 1일 대통령 령(令) 제6542호의 의하여 동교리(東橋里)는 복내면(福內面)으로 한천리(寒天里)는 승주군 송광면 재개편 9개리로 운영되어 오다가 1985년 1월 17일 주암댐 수몰지역으로 고시되어 가구 및 경지면적의 40%가 수몰되는 실정으로 보성군에서 가장 적은 면(面)이 되었다.
백암(白岩) : 문덕면 운곡리
백암(白岩) 마을은 보성강을 건네주던 뱃사공 해주오(海州吳)씨가 1957년경 처음으로 이곳에 집을 짓고 살다가 차차 늘어나 5일 시장이 생기고 각 기관이 옮겨와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1985년 1월 17일 주암(住岩)댐 건설로 수몰되어 없어졌다. 마을의 이름은 5일 시장이 처음으로 생겨 새장터라 부르다가 마을앞 도로변에 차돌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본따 백암(白岩)이라 하였다.
신운(新雲) : 문덕면 운곡리
신운(新雲) 마을은 1630년경 여산송(礪山宋)씨가 입촌하여 부락을 형성한 후 타 지역에서 많은 사람이 이주하여 30여가구의 마을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주암(住岩)댐 건설로 마을 대부분이 수몰되어 인근에 신소재지가 형성되어 각 기관이 입주하였다. 마을의 지명은 마을 형국이 낚시대와 낚시줄 같아서 항시 평온하고 타 지역에서 이주해와 차차 마을이 융성해 지자 새골목 신기(新基), 신운(新雲),이라 하였다 한다. 신운마을에 경찰관 주재소(그후 문덕지서)가 있어서 여순반란사건(1948년)시 많은 면민들의 피난처이기도 하였다.
대운(大雲) : 문덕면 운곡리
운곡리(雲谷里)는 본래 보성군 문전면의 지역으로서 지대가 높아서 구름이 많이 끼므로 굴목, 굴목 또는 운곡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하 신운리(新雲里), 대운리(大雲里), 무탄리(舞灘里), 석동리(石洞里)와 봉덕면(鳳德面)의 오리(梧里), 마치리(馬峙里) 일부를 면에 편입되었다. 대운(大雲) 마을은 1500년경에 전주이씨(全州李氏)가 입촌하여 70여 세대의 큰마을을 이루었으나 농경지가 협소하여 점차 줄어들어 20여 세대에 달하는 적은 마을이다. 마을의 지명은 주변의 산세가 수려하여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운중반월(雲中半月)이란 명당이 있다는 곳으로 마을형성 당시부터 큰굴목, 큰골목이라 부르다가 대운(大雲)이라 칭하였다.
오리(梧里) : 문덕면 운곡리
오리(梧里) 마을은 1780년경에 함안윤(咸安尹)씨가 정착하여 10여가구 살다가 주암댐 건설로 수몰되어 뿔뿔이 흩어져 지금은 옛터만 남아 있다. 마을의 지명은 정자나무 주위에서 농사일도 하다가 그늘 밑에서 쉬고, 명절이면 앉아서 쉴 수 있는 우산각이 있는데 오동나무와 버드나무가 많다하여 “오류” “오류골” “오리”라 하였다 한다.
웅치(雄稚) : 문덕면 운곡리
웅치(雄稚)마을은 1840년경에 제주양(濟州梁)씨가 정착하여 형성된 것으로 보여진다. 마을에 거주하는 가구수가 적고 영세하여 빈민촌이었으나 주암(住岩)댐 건설로 수몰되어 뿔뿔이 흩어져 터만 남은 마을이다. 마을의 지명은 뒷산이 모양이 죽은범(호랑이) 같이 생겨 웅치(雄稚)라고 하였다.
무탄(舞灘) : 문덕면 운곡리
무탄마을은 1200년경에 이천서(利川徐)씨가 입향항 형성된 것으로 보여진다. 1981년 9월 태풍 애그니스로 인하여 마을전체가 수몰되어 많은 재산을 잃고 현위치에 집단 이주단지를 형성하여 새터전을 잡았으나 주암댐 수몰로 마을 전체가 이주하는 비운(悲運)의 마을이다. 마을의 지명은 당초에는 마을 중앙으로 시냇물이 흘렀는데 지각변동으로 인하여 냇가가 매립되어 큰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 그후 언젠가는 다시 시냇물이 춤을추고 흘러갈것이라 하여 “무탄(舞灘)이라 하였다 한다.
석동(石洞) : 문덕면 운곡리
석동마을은 1280년경에 나씨(羅氏)와 이씨(李氏)가 따뜻한 보금자리를 찾다가 사방이 산으로 둘러 쌓여있고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이 좋아서 정착하였다 한다. 마을의 지명은 주변에 돌이 많아서 돌고을 또는 독골이하 부르다가 “석동”(石洞)이라 하였다 한다.
병치(幷峙) : 문덕면 운곡리
병치마을은 1600년경에 하동정(河東鄭)씨가 입촌하여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보여진다. 마을지명은 마을동쪽에 양가랭이재가 있으며 마을 앞산이 병풍(屛風)처럼 둘러 쌓여 있어서 “가랭이”라고도 부르다가 병치(倂峙)라고 불렀다 한다.
장동(長洞) : 문덕면 운곡리
장동마을은 입촌 성시나 마을형성시기의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마을앞에 놓여있는 고인돌이나 주변에 흩어진 청자파편으로 보아 고려시대 이전부터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보여진다. 마을의 지명은 “소쿠리” 형국이라 “감내골” “진골”이라 부르다가 동네어귀에 큰 고인돌이 있다하여 “거문골”이라고도 불렀으며 현재는 장동(長洞)이라 불렀다 한다.
가천(可川) : 문덕면 용암리
용암리(龍岩里)는 본래 보성군 문전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가천리(可川里)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용암(龍岩)이 있으므로 용암리라 해서 문덕면에 편입되었다. 가천마을은 1320년경에 성주이(星州李)씨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보여진다. 마을의 지명은 마을뒷산이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갈호등(介虎藤)이라하여 마을을 휘감아 도는 하천이 있어 갈천(介川), 가천(可川)이라 하였다 한다.
교촌(校村) : 문덕면 용암리
교촌마을은 1780년경에 보성선(寶城宣)씨가 정착하여 형성되었다 한다. 마을의 지명은 본래 가천현(可川縣)의 지역으로 이곳에 향교촌(鄕校村)이 있으며 석양동(夕陽洞)에 석양사(夕陽寺)가 있었다 하여 “시앙골” “샘골”이라고도 불렀으나 향교가 있었던 곳이라하여 “교촌”(郊村)이라 하였다 한다.
덕봉(德峰) : 문덕면 운곡리
덕봉마을은 1530년경에 황씨(黃氏)가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으나 마을이 융성하지 못하고 전주이씨(全州李氏)가 들어와 마을이 크게 융성하였다 한다. 마을의 지명은 보성군의 끝부분에 위치한 덕봉산(德峰山)을 수구막이라고도 했으며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그 산밑에 팔명당(八名堂)이 있다고 하여 “큰봉산 ”덕봉산“의 이름을 본다 ”덜봉“ 이라고도 부르다가 ”덕봉“(德峰)이라 하였다 한다. 89년 주암댐 건설 완공으로 인하여 마을전체가 이주하여 옛터의 흔적만 남아 있다.
척치(尺峙) : 문덕면 덕치리
덕치리(德峙理)는 본래 보성군 문전면(文田面)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덕봉리(德峰里), 척치리(尺峙里), 옥채리(玉釵里), 장동리(長洞里)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덕봉과 척치의 이름을 따서 덕치리라 하여 문덕면에 편입되었으며 덕치마을은 인근 향교촌(鄕校村)이 있었다는 교답거리에서 이거해와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보이며 입촌성씨나 입촌년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며 마을의 대부분이 수몰되고 지금은 수몰지역 밖에 몆가구만 남아 있다. 마을의 지명은 마을 옆 사리봉에 집을 짓는 목수가 살았는데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먹물과 자를 놓아둔 형국이라 하여 척치(尺峙)라 하였다.
신기(新基) : 문덕면 덕치리
신기마을은 1948년 10월 여순반란사건으로 인근 옥채마을이 대화재로 전소되자 인근 농초에 청도김(淸道金)씨가 입촌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주암댐 건설로 수몰되어 마을이 없어지고 지금은 터만 나아 있다. 마을의 지명은 옥채마을에서 샛터를 잡아 이주하였다 하여 “샛터” 즉 “신기”(新基)라 붙여진 것이다.
옥채(玉釵) : 문덕면 덕치리
옥채마을은 1630년 임진왜란 때 화순·능주에서 피난온 청도김(淸道金)씨가 입촌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융성하였던 마을은 1948년 10월 여순반란사건 후 마을에 대화재가 발생하여 30여호로 줄었다. 그 후 1987년 주암댐 건설로 인하여 마을 전체가 수몰되어 없어졌다. 마을 지명은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왕비 4인이 태어날 영당이 있다는 승주군 송광면 월산리 사비 마을 앞에 왕비가 치장하는데 쓰이는 비녀의 명당이 있다는 구전 때문에 “옥채(玉釵)”라 하였다 한다.
하죽(下竹) : 문덕면 죽산리
하죽마을은 1600년경 강릉함(江陵咸)씨가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주암댐 건설로 인하여 마을의 대부분이 없어지고 지금은 수몰지역 위에 몇 가구가 정착하여 적은 마을을 이루고 있다. 마을의 지명은 섬진강(蟾津江) 강가에 위치한 마을이라고 하여 대내라고 부르다가 천봉산(天鳳山)을 중심으로 대나무 열매를 먹고 살았다는 봉황새가 살고 있어 죽림(竹林)이 많은 아랫마을이라 하여 “하죽(下竹)”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상죽(上竹) : 문덕면 죽산리
상죽(上竹) 마을은 1585년경 권율(權慄) 장군의 막하장인 함덕립(咸德立)장군의 장손 함유방(咸有邦)이 입촌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주암댐 건설로 인하여 마을의 대부분이 수몰되어 인근지역에 몇가구가 정착하였다. 마을의 지명은 천봉산(천봉산)을 중심으로 대나무 열매를 먹고 사는 봉황새가 살았는데 죽림(竹林)이 많은 웃마을이라 하여 상죽(上竹)마을이라 하였다 한다.
강각(江角) : 문덕면 죽산리
죽산리는 본래 보성군 문전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강각리(江角里), 상죽리(上竹里), 하죽리(下竹里)를 병합하여 대원사(大原寺)가 있고 큰 산 밑이 되므로 죽산리라 해서 문덕면에 편입되었으며, 강각마을은 백제 무녕왕(武寧王) 때 천봉산(天鳳山) 대원사(大原寺) 창건시 20여호의 농가가 정착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의 지명은 당초에는 하천이었던 것이 천재지변으로 분지(盆地)가 생겼다하며 그 모양이 둥우리 같이 생겨 봉소형국(鳳巢形局)이라고 하며 강가에 생긴 분지를 강각분지(江角盆地)라하고 마을을 강각골로 부르다가 “강각(江角)”이라 하였다.
수월(水月) : 문덕면 봉갑리
수월마을은 조선 숙종 정유년(丁酉年)에 통정대부(通政大夫) 금녕대군(金寧大君) 목향(牧鄕) 김윤길(金允吉)의 18대손 김해김(金海金)씨 김성운(金成雲)이 이거하여 정착하였으나 주암댐 다목적 건설로 수몰되어 마을이 전혀 없어졌다. 마을의 지명은 마을앞을 흐르는 보성강물이 반달형으로 깊고 푸르며 마을 앞뜰도 반달형의 형국으로 “침강반월(沈江半月)”과 “대공명승지(大空名勝地)”가 있다는 전설 때문에 수월마을이라 하였다.
백사(白沙) : 문덕면 봉갑리
백사마을은 서기 1400년경부터 백(白)씨가 입촌하여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그후 충주박, 밀양박, 창원황 씨 등 여러 성씨들이 거주해 오다 주암댐 건설로 수몰되어 1988년도에 뿔뿔이 흩어진 마을이다. 마을의 지명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쳐들어 오자 봉갑사(鳳甲寺) 천불전(千佛展)에서 석회(石灰)가루를 풀어 뿌리니 온 냇가가 하얀 쌀뜨물로 변하여 이에 놀란 일본군이 이곳에 많은 군사가 있는 줄로 믿고 황급히 도망쳤다는 일화가 전해오고 있으며 이곳 보성강변에 흰모래가 많다하여 백사(白沙)라 불렀다 한다. 그 후 1981년 태풍 애그니스로 전마을이 수몰되어 많은 재산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단양(丹陽) : 문덕면 봉갑리
봉갑리(鳳甲里)는 본래 보성군 문전면(文田面)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백사리, 단양리, 수월리를 병합하여 봉갑사(鳳甲寺)가 있었으므로 봉갑리라 해서 문덕면에 편입되었으며 단양마을은 서기 817년 신라 헌덕왕(憲德王) 9년에 봉갑사(鳳甲寺)가 창건된 것으로 보아 그 때 당시 설촌하였을 것으로 보며 충주박(忠州朴)씨가 입촌하여 강(姜)씨 등이 거주하는 조그마한 마을이다. 마을의 지명은 천봉산(天鳳山) 줄기에서 내려온 아름다운 풍치와 경관이 좋아 “단양동(丹陽洞)”이라 하였다.
신기(新基) : 문덕면 봉갑리
신기마을은 서기 1630년경 김해김(金海金)씨가 정착하여 형성된 것으로 보이며, 마을의 지명은 인근 수월 마을에서 “샛터”를 잡아 이주해와 신기(新基)라고 하였다 한다. 1982년 1월 1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하여 봉갑1리에서 봉갑3리로 분구되었으나 1985년 1월 주암댐 건설로 인하여 뿔뿔이 흩어져 마을이 없어지고 지금은 잡초만 무성하다.
마치(馬峙) : 문덕면 봉정리
봉정리(鳳亭里)는 본래 보성군 봉덕면(鳳德面)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반송리(盤松里), 마치리(馬峙里) 일부를 병합하여 소나무 정자와 봉덕면의 이름을 따서 봉정리라 하여 문덕면에 편입되었으며 마치마을은 1350년경 청주한(淸州韓)씨가 입촌하여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1989년도 주암댐 건설로 수몰되어 마을전체가 이주한 실정이다. 마을의 지명은 마을앞산 형국이 말(馬)형국이라 하여 “몰치”라 부르다가 “말치”(馬峙)라 하였다 한다.
오산(梧山) : 문덕면 봉정리
오산(梧山) 마을은 1795년경에 죽산안(竹山安)씨가 나주지방에서 이거(移居)해와 설촌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주암댐 건설로 수몰되어 마을 전체가 이주하는 설정이다. 마을의 지명은 뒷산인 기태봉(騎台峰)에서 뻗어 내려온 속등이 가제형국이라 하여 오(鰲)자를 인용하여 “오산(梧山)이라 하였으나 풍수지리설에 의한 “오명당”(五明堂) 자리가 있다하여 “오명”(五明)이라 부르다가 “오뫼” “오산”(梧山)이라 하였다 한다.
반송(盤松) : 문덕면 봉정리
반송마을은 1780년경부터 해주최(海州崔)씨 입촌하여 마을이 형성하였으나 집을 짓기만 하면 도깨비가 나타나 세 번이나 쓰려버려 최씨가 살곳이 아니라 하여 마을을 떠난후 광산김(光山金)씨가 들어와 마을이 크게 융성하였으나 주암댐 건설로 수몰되어 마을 전체가 없어졌다. 마을의 지명은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화낙지”(李花落地)라는 명당이 있다하여 “오얏등”이라고 부르다가 그후 “반송”(盤松)이라하였다.
내동(內洞) : 문덕면 양동리
양동리(陽洞里)는 본래 보성군 봉덕면(鳳德面)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반월리(半月里), 마치리(馬峙里), 양지리(陽地里), 법화리(法化里), 내동리(內洞里), 금천리(錦川里)의 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양지리(陽地里)와 내동리(內洞里)라 하여 문덕면에 편입되었다. 내동마을은 1510년 조선중종(朝鮮中宗)초 보성선(寶城宣)씨가 선지촌(宣地村)이란 곳에 정착하면서 설촌하였으며 1520년경에 파주염(坡州廉)씨가 입주하면서 큰마을을 이루었다. 마을의 지명은 양지(陽地)마을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안골” “내동”(內洞)이라 하였다.
양지(陽地) : 문덕면 양동리
양지마을은 형성년대는 알 수 없으며 하동정(河東鄭)씨가 정착하면서 형성된 것으로 보여진다. 마을의 지명은 양지에서 내동마을로 넘어가는 골짜기에 마을이 있다하여 “넘은골”이라고도 부르다가 마을입구에 양산서원(梁山書院)이 있어 “원촌”(院村)이라고도 불렀으나 그 후 따뜻한 지형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양지”(陽地)라고 불렀다.
반월(半月) : 문덕면 양동리
반월(半月)마을은 1725년경 고령박(高靈朴)씨가 귀산리(龜山里) 부곡(釜谷) 마을에서 이거하여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그후 보성선씨(寶城宣), 파주염씨(坡州廉氏)등이 살고 있다. 마을의 지명은 형국이 반달형(초승달에서 점점 켜져가는 보름달)이어서 ‘어린다리’ ‘반월’(半月)이라 붙여진 격이다. 마을에는 모전(모田)이 많았으며 커다란 사창(私創)이 있었다 한다.
진산(鎭山) : 문덕면 귀산리
진산(鎭山)마을은 고려중엽 부곡(富谷)마을에서 고령박(高靈朴)씨가 이거하여 촌락을 이룸으로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며 마을의 지명은 웃진산(上眞)과 아랫진산(下眞)의 2개 마을이 있었으나 웃진산을 일제시대 때 의병대장 안규홍(安圭洪) 의병활동 거점으로 일본군과 자주 접전하였으며 많은 왜군을 물찔렀던 곳이라 “진터” “진산”(眞山)이라 불렀다 한다. 그후 웃진산은 일보군이 불을 질러 마을이 전소되었으며 아랫진산은 1950년 6?25사변시 마을이 전소되었으나 건물을 신축하여 마을을 이루었다.
부곡(富谷) : 문덕면 귀산리
귀산리(龜山里)는 본래 보성군 봉덕면(鳳德面)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부곡리(富谷里)와 강변리(江邊里) 내동리(內洞里) 금천리(錦川里)의 각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거북 형상으로 생긴 산밑이 되므로 귀산리(龜山里)라 해서 문덕면에 편입되었다. 부곡(富谷)마을은 고려초기에 밀양박(密陽朴)씨가 입촌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으나 지금은 광산김(光山金)씨가 많이 살고 있으며 마을의 지명은 고려시대에는 고려자기를 굽던 마을이며 조선시대에는 생황용기를 굽던 마을이어서 항상 돈이 많기로 이름이나 부자마을이라 하여 부곡(富谷)이라 하였다 한다.
법화(法化) : 문덕면 동산리
동산리(桐山里) 본래 보성군 봉덕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양지리(陽地里) 법화리(法化里) 강변리(江邊里)의 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동소산(桐巢山 : 군산천) 밑이되므로 동산리라 해서 문덕면에 편입되었다. 법화(法化) 마을은 1400년경 동소산(桐巢山) 밑 담안골에 순창조(淳昌趙)씨가 들어와 살면서 큰 마을을 형성하였다. 마을의 지명은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천봉산 및 강각동에 위치한 대원사(大原寺)를 창건하고 봉의 집격인 동소산 밑에 법화사(法化寺)를 증수하여 불교가 성행하였으며 그후 법화사 주위에 형성된 마을의 지명은 동소산 밑에 법화사(法化寺)를 증수하여 불교가 성행하였으며 그후 법화사 주위에 형성된 마을이름은 절의 이름을 빌러 “법화”라 하였다 한다.
강변(江邊) : 문덕면 동산리
강변(江邊) 마을은 고려말엽(高麗末葉)에는 하천(河川)이었으나 천재지변으로 인하여 분지(盆地)가 생겨나 따뜻하고 주위의 산세가 수려하여 파주염(坡州廉)씨가 이본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며 마을의 지명은 동소산(桐巢山)밑에 봉가촌이라는 마을이 있었으나 생활여건이 불편하여 현 위치로 옳기고, 하천분지(河川盆地)가 새긴 마을이라 하여 강변(江邊)이라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