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말엽(朝鮮末葉) 1897년에 보성군(寶城郡) 14개 면개편으로 보성강(寶城江)을 중심한 동남지역(東南地域)을 겸어면(兼於面), 서북지역(西北地域)을 백야면(白也面)이라하여 배실(白也) 또는 우무실(井谷)의 이름을 따서 백야면 또는 정곡면(井谷面)이라 하여 입석(立石), 자포(自抱), 고전(庫田), 숙호(宿虎), 정곡(井谷), 장추(壯秋), 백곡(白谷), 덕음(德音), 가전(柯田), 오호(五湖), 평화(平化)의 11개리 동을 관할하였는데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겸어면(兼於面)의 금곡(琴谷), 신기(新基), 대겸(大兼), 도림(道林), 안적(安迪), 수교(水橋), 둔기(屯基), 사곡(沙谷), 가곡(加谷), 오도(五道), 침동(針洞), 능묵(能默)의 12개리와 복내면(福內面) 사평리(沙坪里)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겸어면의 “겸”(兼)자와 백야면의 “백”(白)자로 2개면의 머리글자를 붙여서 겸백면(兼白面)이라 개칭하고 석호(石湖), 운림(雲林), 은덕(隱德), 평호(平湖), 도안(道安), 용산(龍山), 남양(南陽), 사곡(沙谷), 수남(水南)리의 9개법정리(法定里)와 16개 행정운영리(行政運營里)로 되어 있다.
선돌(立石) : 겸백면 석호1리
마을 서쪽 하천변에 청룡등(靑龍登) 중턱에 큰 바위가 우뚝 서 있으며 이 선돌에 창녕조씨 세기라는 비문이 지금도 선명하게 기록돼 있으며 이 바위를 선돌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선돌이라 하였다.
고전(庫田) : 겸백면 석호2리
1830년경에는 화잔(花殘) 고잔(枯殘)등으로 지명을 쓰다가 1860년경에 마을 앞을 가로 흐르는 정자강변(亭子江邊)에 장라(張羅)들, 반송곡(盤松谷), 신석곡(神石谷)등을 개척하여 곡식을 거두어들이면서부터 고전(庫田)으로 이 마을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자포(子抱) : 겸백면 석호2리
자포마을은 고려말 밀양박씨 일가족이 주위 산세가 마치 선남(仙男)이 선녀(仙女)를 포옹한 듯 마을의 형국이 좋아 터를 잡고 살면서 노상(路上)박씨 노하(路下)박씨라 이를 만큼 번창하다가 조선조 초 쇠퇴하여 지금의 득량면(得糧面) 등지로 이거하고 그후 제주양(濟州梁)씨인 양하정(梁河炡)이 입주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자포(子抱)실은 마을앞이 선형(船形)이라 하여 고비(古碑)나 족보에 자포(子抱) 포곡(浦谷), 자포(子抱)라고 하여 왔으나 일제시대에 자포(子抱)로 변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곡(井谷) : 겸백면 운림1리
정곡마을은 조선조 중엽 김해김(金海金)씨 김정수(金正洙)가 경기도 연천(連川)에서 살다가 그의 아버지 김효운(金孝運)이 사화(士禍)로 유배(流配)당하자 김정수 형제들이 각지로 흩어지면서 정착지를 찾아 방랑중 마을의 형국과 구슬같이 맑게 솟아 오르는 샘물을 보고 이곳에 터를 잡고 진원박씨 가문의 딸을 맞아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 정곡마을의 지명은 이곳이 사방으로 산이 둘러쌓여 있고 마을 중앙에는 옥천(玉泉)이란 샘이 있는데 구슬처럼 맑게 솟았다 하여 정곡 또는 옥천이라 불려지고 있다.
숙호(宿虎) : 겸백면 운림1리
숙호(宿虎)마을은 1789년경에 여산송(礪山宋)씨인 송덕회(宋德會)의 고조부께서 고흥에서 살다가 생활터전을 마련하고자 이곳을 둘러보니 정자강(亭子江)이 휘둘아 흐르고 물 건너로 바라보는 호랑이형 산세가 좋아 초가 삼간을 짓고 김해김(金海金)씨 집안과 결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한다. 마을지명은 마을앞으로는 보성강이 흐르고 마을뒷산 덕수봉(德首峯)의 산세가 호랑이가 잠자고 있는 형국으로 마을의 재난을 막아주고 마을을 지켜준다고 하여 숙호(宿虎)라 부르게 되었다.
내백(內白) : 겸백면 운림2리
안배실(內白)은 1575년경에 오(吳)씨, 최(崔)씨, 고(高)씨 3성씨가 농사를 짓기 위해 처음 이 마을에 정착하여 살면서 낮에는 농장을 넓히고 밤에는 한학을 연구하면서 살아오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혼란기를 겪어 뿔뿔이 헤어져 버리고 현재 남양방(南陽房)씨, 함양박(咸陽朴)씨, 광주이(光州李)씨 3성씨가 백야면(白也面)의 소재지로써 백곡, 백곡리, 백야, 내백, 배실이라 불러왔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소재지를 중심으로 밖에 있는 마을을 밭배실(外白) 안에 있는 마을을 안배실(內白)이라 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외백(外白) : 겸백면 운림2리
외백(外白)은 세종2년 1492년에 강씨(姜)가 복내면(福內面)에서 이곳으로 이주하여 농토를 일구며 정착하자 이곳을 지나던 남씨(南)가 서로 협동하여 생활할 것을 권유 옹기를 만들면서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989년에 주암댐 건설로 인하여 수몰지구로 고시되어 13가구중 3가구는 도시 지역으로 이주하고 10구만 남아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외백(外白)은 마을 우측 산등성이에 벡토(白土)를 파내었던 굴(토굴)이 있으며 백자를 굽던 가마터가 마을 우측에 남아있는 점으로 보아 백골터였던 것이 외백곡(外白谷)으로 불리다가 지금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당시 지금의 외백(外白)으로 부르고 있다.
상장(上莊) : 겸백면 운림2리
웃정골(上莊)마을은 조선조 세종(李朝世宗)2년 1420년에 전주추씨(全州秋氏) 일가족이 옹기 그릇을 만들기 위해 점토 및 묵토를 찾아 이곳에 정착 옹기 그릇을 만들면서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지명은 1914년 이전에는 백야면(白也面)지역으로 정골 웃정돌 등으로 불리다 행정구역 통폐합시 겸백면(兼白面)으로 편입되면서 웃정골(上莊)이라고 지명을 붙이게 되었다.
하장(下莊) : 겸백면 운림2리
아랫정골(下莊)마을은 1422년경 웃정골(上莊)마을에 정착했던 전주추(全州秋)씨 일가족과 남양제씨(南陽諸氏) 일가족이 상장마을에서 옹기 그릇을 만들 수 있는 점토를 구하기 위하여 이 마을에 정착 생활하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마을의 지명은 1914년 이전은 백야면(白也面)지역으로 정골, 웃정골, 아랫정골 등으로 부르다 행정구역 통폐합당시 겸백면으로 편입되면서 상장(上莊)마을 밑에 위치 한다하여 아랫정골(下莊)이라 했다 한다.
아랫덕음(下德) : 겸백면 은덕1리
은덕리(隱德里)는 본래 보성군(寶城郡) 백야면(白也面)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은치리, 상덕리, 덕음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은치와 덕음의 이름을 따서 은덕리(隱德里)라 하였다. 아랫덕음(下德)은 1586년경 김해김(金)씨인 김자회가 이 마을의 지세를 보고 정착지를 택하여 안착하였으며 그 후 김해김씨의 외손인 제주양씨가 터전을 확정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하덕(下德)마을의 지명은 마을주위의 산봉우리 이름이 학두봉, 매봉, 수리봉, 제비봉이 있어 사방의 산봉우리가 마을을 향해서 새들이 날아드는 형국이라 하였고 옛날 닭집을 “덕”이라 하였는데 새집이 가려져 있다는 뜻으로 덕음(德音)이라 하였다 한다.
웃덕음(上德) : 겸백면 은덕2리
웃덕음(上德)마을은 조선시대 중기 1580년경에 현풍곽씨(玄風郭氏) 구태가 호조판서를 지내다 정국이 혼란하여 남쪽으로 피신하다 이곳에 정착 가장 안전한 곳으로 여기어 은신하면서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처음 마을이 형성되었다. 웃덕음(上德)의 지명유래는 아래덕음(下德)과 같으나 웃마을이라 하여 상덕음 또는 웃덕음(上德)이라 하였다.
숨은재(隱峙) : 겸백면 은덕2리
숨은재(隱峙)마을은 1680년경에 보성읍(寶城邑) 봉산리(烽山里)에서 보성선(寶城宣)씨가 이 곳에 들어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숨은재(隱峙)마을의 지명은 부락을 둘러싸고 있는 산세가 “꿩”의 형국이며 그 앞쪽에 매봉이 있어 “꿩”이 숨어 있는 것 같다 하여 은치(隱鴙)라 하였는데 상덕음(上德音)에서 넘어오는 고개인 너멍골재를 넘던 한 풍수가 이곳은 지세를 보아 큰 인물이 배출될 것이라 하여 치(鴙)를 치(峙)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평화(平化) : 겸백면 평호1리
평호리(平湖里)는 본래 보성군(寶城郡) 백야면(白也面)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가전리(柯田里), 오호리(五湖里), 평화리(平化里)를 병합하여 평화(平化)와 오호(五湖)의 이름을 붙여서 평호리(平湖里)라 하여 겸백면(兼白面)에 편입되었으며 평화(平化)마을은 1586년에 창녕조씨(昌寧曺氏)로 입보성(入寶城)한 조대관의 손 조흥제가 조성면(鳥城面)에서 처음 이 마을에 입촌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 마을의 지명은 들 건너편에서부터 마을 뒤쪽까지 보성강(寶城江)이 굽어 흐르고 마을 뒷산은 천마산이 뻗어 내려와 마을을 감싸 호위하고 있으며 마을 앞동산은 소(牛)가 평화(平和)롭게 누워 있는 모습이다. 어느날 도승이 훈령을 와서 마을의 형국을 살펴보고 마을 이름을 평화(平化)라고 부르게 되면 후일에 어떠한 일에도 피해 없이 항상 화평(和平)할 것이라 하여 평화라고 불러지고 있다.
오호(五湖) : 겸백면 평호2리
오랭이(五湖)마을은 1568년경에 백야면(白也面)의 사람으로 박도사와 최도사라는 두 사람이 오호 부락앞에 마을을 형성하기 위하여 5일 시장으로 세워 촌락을 형성하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시장이 없어지고 지금은 농경지로 변하였으며, 안쪽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오호(五湖 : 오랭이)는 정자 강물이 호수처럼 맑고 마을을 앞질러 굽어 흐르므로 마을명을 오호(五湖)라고 불러왔다.
상가(上柯) : 겸백면 평호3리
상가(上柯)마을은 1608년경에 남평문(南平文)씨인 문상검(文尙檢)이 화순남평(和順南平)에서 이주하여 정착지를 정하고 당시 진주정(晋州鄭)씨인 정협(鄭協)씨 일가족도 도촌(道村)에서 이곳으로 이주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상자(上柯)마을의 지명은 뒷산 기슭에 가죽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어 그 잎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었는데 이 가죽나무는 매년 순을 잘라서 음식으로 사용해도 굿굿이 자라는 특성이 있어 가죽나무와 같이 마을 이름을 가전(柯田)이라 부르다 윗마을 상가(上柯), 아래 마을은 하가(下柯)라고 부르게 되었다.
하가(下柯) : 겸백면 평호3리
하가(下柯)마을은 서기 1615년에 고흥(高興)대서에서 살던 경주김(慶州全)씨인 김중희(金重喜)가 농작물이 해일로 자주 재해를 당하자 이곳에서 농사를 지으려고 정착하였고 제주양(濟州梁)씨인 양회룡(梁會龍)이 겸백면 덕음(德音)에서 이주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가(下柯)마을의 지명은 상가 마을과 같으나 아랫마을이라 해서 하가(下柯)라고 지명을 부르게 되었다.
도림(道林) : 겸백면 도안리
도안리(道安里)는 본래 겸어면(兼於面)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수교리(水橋里), 둔기리(屯基里), 도림리(道林里)의 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도림(道林)과 안적(安迪)의 이름을 따서 도안리(道安里)라 하여 겸백면(兼白面)에 편입되었다. 도림마을은 1595년경 이곳 광대터라는 곳에 광산김씨(光山金氏)가 마을을 형성하고 거주하다 큰 재난으로 문덕면(文德面) 반송리(盤松里) 등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1651년에 큰 안공이(安迪)마을에서 하동정(河東鄭)씨 후손이 이곳으로 분가 이주한 곳으로 작은 안공이(道林)라 불러왔고 현재는 도림 마을로 지명을 변경 지금에 이르고 있다.
오초(五草) : 겸백면 도안리
오초(五草)마을은 1695년경에 관산임(冠山任)씨와 광산김(光山金)씨가 처음 마을을 형성하였으나 이주해 버리고 1848년에 안적(安迪 : 큰안공이)부락에서 하동정(河東鄭)씨인 정환형(鄭煥衡)이란 분이 오초(五草)마을로 분가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지명은 오초(五草)마을의 지형이 석호산(石虎山 425m)에서 까마귀가 날아와 알을 품으려는 형국이라 하여 오치동(烏峙洞)이라 하였는데 구전에 의하면 전란시 군대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본면에 1초대(一草隊)부터 5초대(五草隊)까지 주둔하게 되었는데 본부락 오치동(烏峙洞)에는 5초대(五草隊)까지 주둔하게 되었다. 우연히 오치(烏峙)와 발음이 비슷한 5초대만이 큰 전과를 올렸다고 하며 그 후로 마을이름이 오초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안적(安迪) : 겸백면 도안리
안적(安迪)마을은 1466년에 하동정(河洞鄭)씨 정화(鄭和)가 보성군수(寶城郡守)로 부임시 형(兄)을 따라 입보성했던 정세(鄭稅)의 현손 정길(鄭佶)씨가 1595년경에 본 마을에 이주하여 처음 마을이 형성되었다. 안적(安迪)마을의 지명은 하동정(河洞鄭)씨 정길(鄭佶)이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란을 격은 후 제일 안전한 곳을 찾던 중 본 마을의 명산인 석호산(石虎山 425m)의 지형이 와우형(臥牛形)으로 펼쳐져 가장 안전한 곳이라 하여 안공이라 하였다. 이 마을이 먼저 형성되었다고 해서 큰안공이(安迪)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안적(安迪)으로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다동(茶洞) : 겸백면 용산1리
용산리(龍山里 : 능묵 : 能默)는 본래 보성군 겸어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침동리, 능묵리, 수교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대룡산(大龍山 440m)밑에 위치하고 있어 용산리라 해서 겸백면에 편입되었다. 다동(茶洞)마을은 1455년경에 화천(花泉)마을에 처음 정착한 광산김(光山金)씨인 김모(金瑁)씨의 후손이 1539년에 이곳으로 옮겨 살면서 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 다동(茶洞)은 광산김(光山金)씨인 김모(金瑁)씨가 용산리에 이주 은거할 당시에 용산1구리 전체를 능묵(能默)이라 하여 왔는데 본 마을 뒤에 차(茶)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어 차밭등이라 부르다가 일제시대에 마을 이름을 다동(茶洞이라 불렀으며 지금도 차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다.
화촌(花村) : 겸백면 용산1리
화촌(花村)마을은 1455년경 이웃 화천(花泉)마을에 정착한 광산김(光山金)씨 김모(金瑁)의 후손이 1539년에 이곳에 분가하여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화촌(花村)마을의 지명은 광산김씨인 김모(金瑁)씨가 정착하면서 평온한 환경속에서 편히 은거할 수 있는 곳이라 하여 화천(花泉), 다동(茶洞), 용치(龍峙)와 함께 능묵(能默)이라 부르고 있음 화촌(花村) 마을앞에도 조그마한 마을이 있는데 득량면 쇠실로 가는 고개라고 해서 일명 용재라고 부르는 용치(龍峙)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화천(花泉) : 겸백면 용산1리
화천(花泉)은 조선조 단종시 1455년경에 광산김씨(光山金氏) 김모(金瑁)가 함양군수(咸陽郡守)로 부임한 후 영상(領相) 황보인(皇甫仁)의 사위가 되었으며 원래 김시습(金時習)과 교분이 두터워 자주 내왕 대화하고 심간(心肝)을 토론하며 당세를 기피하는 방랑의 회포를 갖더니 그때에 수양대군(首陽大君)과 권람(權覽) 한명회(韓明會) 등이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등을 추살하고 영의정(領議政)겸 내외 병마도통사를 자행했다는 말을 듣고 슬피하시어 처음에 사직할 뜻을 두다가 올해 6월에 선위(禪位)의 뜻을 듣고 벼슬을 버리고 남하하여 본 마을에 은거하게 됨으로써 처음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화천(花泉)마을의 지명은 광산김씨(光山金氏)인 김모(金瑁)가 본 마을에 이주 은거하면서 이곳의 산세가 능히 몸을 숨기고 은거할 수 있는 곳이라는 뜻으로 용산리 4개 자연 부락을 모두 능묵(能默)이라 하였으며 현재 지명인 화천(花泉)과 화촌(花村)마을을 위와 아래에 있는 마을로 아랫마을은 마을앞에 큰동동 우물이 있어 화천(花泉)이라 하였고 윗마을은 화촌(花村)이라 부르게 되었다.
바늘골(針洞) : 겸백면 용산2리
바늘골(針洞) 마을은 1788년 광산김씨(光山金氏)인 김지만(金志萬)의 부부가 이곳에 정착 농사를 지으면서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 침동(針洞) 마을의 지명은 뒷산에 바늘처럼 생긴 바위가 마을을 내려다보고 마을이 바늘 바위를 형해 깊숙이 들어있으므로 바늘골(針洞)이라 하였는데, 그후 예당, 조성 간척지의 농업용수 공급과 득량 발전소 송수를 위해 1927년 건설한 보성강 수력발전소 용산 저수지는 본 마을에서 득량면 수락동까지 송수터널을 뚫어 관계용수를 송수함으로써 터널은 바늘골이요 지하로 흐르는 물은 실이라 하여 풍수지리설에 얽힌 선현들의 예언에 감탄할 뿐이다.
무더리(水橋) : 겸백면 용산2리
무더리(水橋) 마을은 광산김씨(光山金氏) 김모(金瑁)의 셋째 아들인 김석백(金錫伯)씨가 조선조 성종 때 주부(主簿)라는 무(武)의 벼슬을 하였는데 그의 묘(墓)가 수교(水橋)마을 뒷산에 있어 그 후손이 이곳을 왕래하다 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지명은 마을 앞에 흐르는 보성강을 가로질러 인접 도안리 까지 넓이 100m에 징검다리를 놓았는데 물이 많을 때는 건너지 못하고 쳐다만 본다해서 이곳을 무더리(물다리) 또는 수교라고 불러왔다.
대겸(大兼) : 겸백면 남양1리
남양리는 한때 보성군 겸어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금곡리(琴谷), 신기리(新基), 대겸리(大兼), 도림(道林)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겸백면에 편입되었다.대겸마을은 마을 뒤산이 차일처럼 솟아있고 그 모양이 왕자 같다하여 채일봉 또는 왕재산이라 불러오고 있는데 차일(遮日)밑에 사흘(三日) 잔치없다 하여 한 집안이 3대 이상살면 좋지 안다는 속설로 오래도록 대를 이어사는 집안이 없으며 산성촌으로 큰 마을이 형성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마을의 지명은 본래 겸어면의 소재지로 겸어면의 으뜸이 되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대겸어 또는 겸어로 칭하였고 마을 동편은 감나무골 서편은 비자골이라 불렀으며 지금은 마을 이름을 대겸(大兼)이라 부르고 있다.
새터(新基) : 겸백면 남양1리
새터(新基) 마을은 1788년경에 조양임(兆陽林)씨, 광주노(廣州盧)씨, 밀양박(密陽朴)씨의 3성씨가 처음 이곳에 마을을 형성하여 살다가 뿔뿔이 헤어져 버리고 1865년경에 함양박(咸陽朴)씨와 진원박(珍原朴)씨가 이곳에 정착 지금의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마을의 지명은 대겸마을이 생긴 뒤로 새로운 마을을 형성하여 새터(新基)라고 부르게 되었다.
묘동(描洞) : 겸백면 남양2리
묘동(描洞) 마을은 1677년경에 광산김(光山金)씨인 김종아(金鐘雅)가 능묵에서 이곳으로 이주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지명은 마을 앞에 바위가 고양이 형국이라 하여 이 바위를 묘암(描岩 : 괘바우) 이라 하였으며 마을 이름도 묘동(描洞)이라 하였다.
오금실(琴谷) : 겸백면 남양2리
오금실(琴谷)마을은 1780년경에 안동권(安東權)씨 2가구(二家口)가 이곳을 지나다 마을을 둘러싼 산세를 보고 정착 마을을 형성하였다. 이 마을의 지명은 처음 마을이 형성될 시에는 상곡(上谷)이라 하였는데 마을의 뒷산이 국사봉, 옥녀봉, 거문고, 수두방제, 장고 등으로 불리는 산봉우리가 있어 이는 마치 옥녀가 거문고를 타는 모양같다 하여 거문고줄이 다섯줄이라 오금실(五琴) 로 개명되었으며 1914년경에 행정구역 폐합시 금곡(琴谷)이라 불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모라실(元沙谷) : 겸백면 사곡리
사곡리(沙谷里)는 한때 보성군 겸어면의 지역으로 모래가 많으므로 모래실 또는 사곡(沙谷)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사곡리라 해서 겸백면에 편입되었다. 원사곡은(元沙谷)은 1488년경 경주최(慶州崔)씨가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그후 1788년 정조(正祖) 12년에 진원박씨(珍元朴氏) 만주(滿冑)가 미력면 가평에서 이주하여 마을이 번성하였다 한다. 이 마을지명은 목단(牧丹) 꽃처럼 생겼다 하여 원사곡, 양지, 초암부락 전체를 모란실(丹谷)이라 불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사곡리(沙谷里)로 개명되어 우리말로는 모래실 또는 모라실로 불러지고 원사곡은 가장 으뜸되는 마을이라 해서 부르게 된 이름이다.
양지(陽地) : 겸백면 사곡리
양지(陽地) 마을은 1830년경 이곳에 박광전(朴光前) 선생의 사당을 건립하고 선생의 12대 종손이 원사곡에서 사당 근처로 이거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양지(陽地) 마을의 지명은 처음에는 원사곡 모라실 또는 모래실이라 불러 왔으나 1919년 자연부락명을 원사곡(元沙谷)의 양지바른 따뜻한 곳이라 하여 양지 마을로 부르게 되었다.
초암골(草岩) : 겸백면 사곡리
초암골(草岩)은 1869년경에 지금의 초암산(草庵山 576m))을 금화산(金華山)이라고 불렀으며 초암산의 줄기를 타고 내려온 경치가 빼어나고 이산의 중턱과 봉우리에 망호암(望虎岩)이 장관을 이루고 있어 산세를 보아 진원박씨(珍原朴氏)가 터를 닦고 부락을 형성하였다. 마을 지명은 뒷산인 초암산의 중턱에 오르면 약 300평정도의 평지가 있어 이곳이 바로 금화사의 옛터로 초암산(草庵山)의 이름을 따서 초암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가곡(加谷) : 겸백면 수남리
수남(水南)리는 한때 겸어면의 지역으로써 무네밋재 밑이 되므로 무네미, 무나미, 또는 수남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가곡리, 오도리를 병합하여 수남리라 해서 겸백면에 편입되었다. 가곡(加谷)마을은 1572년에 광주이씨(廣州李氏) 보성 입향 중조(中祖)가 된 수관(秀筦)의 묘(墓)를 원수남(元水南)에 모시고 보니 이곳이 산자수명(山紫水明)하고 토지가 비옥하여 그 후손 이병일(李秉馹)이가 조성면 대곡(大谷)서 이곳으로 이주 정착함으로써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지명은 앞산은 제암산 줄기의 방장산(方仗山 : 576m) 이 있어 그 사이를 흐르는 수남천의 계곡이 깊다하여 가곡(加谷) 즉 더실이라 하였다.
지붓골(地富) : 겸백면 수남리
지부(地富)마을은 가곡(加谷)마을이 형성된 뒤 230년 후 1800년경에 김해김씨(金海金氏) 일가족이 이곳에 정착 마을을 형성하였다. 마을의 지명은 땅이 기름져 초목과 곡식이 잘된다고 하여 지부(地富)라 하였으며, 소(牛)가 풀을 먹고 누운 와우형국(臥牛形局)의 뒷산에 살바위(일명 : 멧돌바위)를 보고 있어 많은 곡식이 나온 곳이라 하여 지부(地富)라 불러지고 있다.
오돗골(五道) : 겸백면 수남리
오돗골(五道)마을은 1740년경에 밀양손씨(密陽孫氏) 만홍(萬洪)이 득량면(得糧面) 호동부락에서 산수(山水)가 수려하고 이곳의 광활한 농토를 개척하기 위해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오돗골(五道)마을은 더실(加谷)에서 득량면(得糧面) 송곡리로 가는 고개에 위치하고 서쪽으로 길게 뻗어내린 방장산의 형국이 마치 5마리(五頭)의 돼지가 내려오는 것 같다 하여 당초에는 오돗치(五豚峙)라 하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하 오도(五道)로 부르게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원수남(元水南) : 겸백면 수남리
원수남(元水南)마을은 1500년경에 김해김씨(金海金氏) 김상배(金相培)가 화순군(和順郡) 능주면(綾州面) 쌍봉리에서 산수(山水)가 수려하고 토지가 비옥함을 알고 이곳에 정착 마을을 형성하였다. 마을의 지명은 마을앞의 초암산(草庵山)과 뒤쪽의 주월산(州越山)사이에 흐르는 물이 남쪽으로 흐른다 하여 처음에는 무남이 또는 무냄이라고 하였으며 한자음으로는 수남(水南)으로 표기되고 있다. 원수남(元水南)은 물의 원수(元水)가 이곳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뜻과 물이 남쪽으로 흐른다는 뜻으로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