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朝鮮時代) 중엽 부차군(浮차郡)에 속하였다가 후에 낙안군(樂安郡 낙주)에 이속(移屬)하였다. 1908년 고상(古上), 고하(古下)의 2개면을 합하여 고상면으로 남상(南上), 남하(南下)를 합하여 남면으로 분합하고 각각 보성군(寶城郡)에 편입하였다. 1915년 고상면과 남면을 병합하여 벌교면(筏橋面)이라 개칭하였다. 1929년 순천군(順天郡) 동초면(東草面) 관할인 연산(連山), 봉림(鳳林), 회정(回亭), 장양(壯陽), 호동리(虎東里)를 편입시켜 벌교읍(筏橋邑)으로 승격시켰다. 1972년 준시체제(準市體制)로 직제를 개편하였으며 1983. 1. 10. 고흥군(高興郡) 동강면(東江面) 장도리(獐島里)를 벌교읍에 편입하였다. (대통령령 제11027호)
홍교(虹橋) : 벌교읍 벌교리
홍교마을은 척등(尺登), 서편(西便), 곡동(谷洞)의 3개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조선조 숙종이전까지는 문헌상의 기록이 없어 마을의 정확한 형성연대는 알 수 없으나 1850년경부터 주민이 하나, 둘씩 거주하였다 하며, 지명은 마을앞을 흐르고 있는 벌교천(筏橋川)이 적은 비만와도 범람하고 여자만(汝自灣)으로부터 조수(潮水)가 밀려 만조시에는 바다로 변하여 건너 다닐 수 없게되자 숙종44년(1705)에 선암사(仙岩寺)의 초안선사(楚安禪師)에 의해 뗏목다리를 없애고 석교(石橋)로 건립되었다. 다리의 모양이 무지개와 같다하여 홍교(虹橋)라 하였으며 다리부근에 있는 마을을 홍교동(虹橋洞)이라 했다 한다.
세망(世望) : 벌교읍 벌교리
세망마을이 형성된 정확한 연대는 기록된 문헌이 없어 알수는 없지만 삼국시대로 추정되며 1700년경에 밀양박(密陽朴)씨, 평강채(平康蔡)씨 등이 집단으로 들어와 정착하면서 마을이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하며, 마을의 이름은 1391년경에 낙안 출신인 고성김(固城金)씨 김윤길 장군이 마을의 뒤에있는 부용산(芙蓉山)에 성(城)을 쌓았다는 설과 1600년경에 낙안군수인 임경업장군(林慶業將軍)이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쌓았다는 두가지 설이 있으며 지금까지도 성(城)이 남아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여자만(汝自灣)을 침입하는 왜적을 경계하며 지키게 하고 장군께서는 낙안성에 머물면서 수시로 이곳의 산성(山城)에 신호로 화살을 보내곤 하였으나 화살이 당도하지 않았다는 전갈을 여러차례들은 장군은 화살 끝에 불꽃을 붙이고 화살을 날린 뒤에 확인하기 위하여 이곳을 지나다가 주민에게 불꽃화살이 하늘을 날아 간 것을 묻고 주민들은 화살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하자 장군께서는 산성으로 친히와서 화살이 당도하였는지 유무(有無)를 확인하였다하며 세상이 다 바라보는 화살을 너희들만이 보지 못하고 당도하지 않았다 하니 아랫마을 주민들에게 확인하라고 분부를 내리시고 이곳을 화살이 보인다하여 시망골(矢望洞) 또는 세망골(世望洞)이라 했다 한다.
계두(鷄頭) : 벌교읍 벌교리
계두마을은 한일합방이전에는 바다로서 소형 꼬막배가 드나드는 지역이었으나 1930년경에 바다를 매립하고 김해김(金海金)씨 등 많은 성씨들이 장차 교통의 중심지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모여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이름은 존제산(尊帝山)의 주봉이 동남쪽으로 힘차게 뻗어 내려 마을뒤에서 머무른 형국이 마치 닭머리와 비슷하여 닭머리로 불리어 오다가 현재는 닭머리의 한자음을 빌어 계두(鷄頭)라 했다한다.
신성(新盛) : 벌교읍 벌교리
신성마을은 1957년 읍민의 인력으로 매립하여 1959년 세망동에 위치하였던 시장을 이곳으로 이설하여 집단으로 들어와 거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하며 마을의 이름은 새로 탄생한 마을이라 하여 신성(新盛)이라 했다 한다.
월곡(越谷) : 벌교읍 벌교리
월곡마을은 1650년경에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추청되며 마을의 이름은 조선시대 부차군(浮槎郡), 단교리(斷橋里)에 속하는 작은 어촌으로 어부들이 마을 뒷산에 해가 걸리면 귀가를 서둘렀고 달이 또한 이 산뒤로 지므로 이산 기슭의 마을을 넘은 골이라 하였으며, 병자호란때에 임경업장군이 낙안군수로 부임하여 머지않아 외적의 침입을 예견하고 군졸을 양성ㆍ훈련시킬 때 화살이 표적을 넘어 이골짜리로 넘어가므로 너멍골이라 했다 하며 현재는 월곡(越谷)이라 부르고 있다.
계성(鷄盛) : 벌교읍 벌교리
마을은 조선시대 중엽부터 형성되었다 하나 고증할 길이 없고 일제시대에 각지에서 집단으로 들어와 신흥시가지를 형성하면서 마을이 이루어졌다 한다. 풍수학설에 의하면 옆 마을인 계두가 닭의 머리에 해당되고 이곳은 몸의 중심부분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계성(鷄盛)이라 했다 한다.
역전(驛前) : 벌교읍 벌교리
역전마을은 일제시대 때 철도가 놓여 교통의 요지로 급성장하면서 자연히 형성된 마을로 마을의 이름은 처음에는 계성리에 속했는데 계성리가 벌교시가지에 위치한 교통중심지로써 고흥, 보성, 승주를 잇는 교통요지의 역할을 수임해오면서 동부권 5일시장의 중추지역으로 발전해 지역의 주민이 늘어나 행정상 운영에 애로가 있자 행정의 원활을 기하기 위해 분구하면서 시가지에 역을 끼고 있어 역전리(驛前里)라 했다한다.
부용(芙蓉) : 벌교읍 벌교리
부용마을은 1845년경에 진주강(晋州姜)씨, 파평윤(坡平尹)씨, 광산김(光山金)씨 등이 들어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며 마을의 이름은 조선시대 낙안군에 속해 있을때에 당시 고을의 원님이 관내를 순시하시던중 이곳에 이르러 계절이 여름철이라 몹시 더워 쉬었다 갈곳을 찾아 살펴볼 때 큰 소나무를 발견하고 나무밑에서 쉬면서 주위를 둘러보고 경치가 좋고 나무밑이 시원하여 좋은 소나무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송정(松亭)이라 했다 한다. 일제시대에 관리소홀로 소나무가 고사하고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부용산(芙蓉山)의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하여 부용(芙蓉)이라 했다 한다.
선근(善根) : 벌교읍 벌교리
선근마을은 1850년경 조씨(趙氏)란 사람이 고흥, 보성 등 지역에서 송광사, 선암사 및 광주등으로 향하는 길손을 상대로 주막을 짓고 살았으며 일제시대 이후 집단으로 거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이름은 옛날 효성이 지극한 선근(善根)이의 효성을 기념하기 위해 다리를 축조하여 선근교(善根橋)라 칭한 이후부터 선근리(善根里)라 했다 한다.
초지(草旨) : 벌교읍 전동리
초지마을은 1480년경에 김녕김(金寧金)씨, 파평윤(坡平尹)씨, 전주이(全州李)씨 순으로 들어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이름은 지형이 소의 머리와 같다하여 쇠머리라 불리어 오다가 근래에는 소가 좋은 풀을 먹고산다는 뜻의 한자음을 빌려 초지(草旨)라 했다한다.
평촌(坪村) : 벌교읍 전동리
평촌마을은 1970년대의 새마을 사업으로 고가(古家)의 파옥시(破屋時) 2호(戶)의 상량문(上樑文)에서 숭정기원원년(崇禎紀元元年 1628년)의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평촌마을은 평사낙안(平沙落雁)이 마을동산을 풍수리지학으로 표시한 말로서 평촌(坪村)이라 했다 한다.
전동(典洞) : 벌교읍 전동리
전동리는 한때 낙안군 고읍면의 지역으로서, 김부자가 살았다하여 김전골, 또는 전골, 전동이라 하였는데 1908년에 보성군 고하면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초지리와 송정리, 평촌리의 일부와 고하면의 중흥리 일부와 순천군 동화면의 봉림리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전동리라 해서 벌교읍에 편입되었다. 전동마을은 1630년경에 순천박(順天朴)씨가 구례에서 옮겨왔고 그 후 진원박(珍原朴)씨, 경주김(慶州金)씨 등이 들어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며 마을의 이름은 조선시대 낙안군 고읍면에 속해 있을 때 마을앞 들판에 옥거리라 불리는 형무소가 있었으며 남문(성고개)옆에 도장골이라 불리는 도축장이 있어 법을 집행하는 관아촌이라 하여 전동(典洞)이라 했다한다.
고읍(古邑) : 벌교읍 고읍리
고읍리는 한때 낙안군 고읍면의 지역으로서 낙안군의 옛읍터이므로 고읍이라 하였는데 융희2년(1908)에 보성군 고하면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지곡리, 장내리, 송정리 일부와 고상면의 굴치리 토산리의 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고읍리라 해서 벌교읍에 편입되었다. 고읍마을은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에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냈던 고창오(高敞吳), 오합겸(吳學謙)과 초계변(草溪卞)씨가 들어와 이합집산(離合集散)으로 거주하였으며 임진왜란 이후에 함양박(咸陽朴)씨, 문화유(文化柳)씨, 순천박(順天朴)씨의 순으로 들어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이름은 백제때 분차군(分嵯郡), 신라경덕왕때는 분령군(分領郡) 고려때는 낙주(樂州) 그후 낙안(樂安)이라는 고을로 불려 오다가 조선성종때에 이 고을에서 강상죄를 범한 사건이 발생하여 고을의 현을 폐하고 현재의 승주군 낙안으로 현을 옮겼다. 폐현된 뒤로는 고을의 옛터다 하여 고읍(古邑)이라 했다 한다.
지곡(芝谷) : 벌교읍 고읍리
지곡마을은 고읍에 관청과 현감이 있을 때 외곽 성밖에 이초시(李初時)가 정착하여 살았으나 3세대후 비운과 돌림병으로 폐가(廢家)하였다. 그후 순천박(順天朴)씨 청주한(淸州韓)씨가 이주해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이름은 노강산(蘆崗山 320m) 줄기의 야산 밑 소쿠리 안 같은 계곡에 따뜻하고 향기 자욱한 곳으로 마을앞에 큰 연못이 있다 하여 지곡(芝谷)이라 불리어 오다가 고려초기에 금화사(金華寺)의 절골승이 마을앞 연못에 있는 연꽃의 향기와 뚝방의 난초, 주위의 미나리 향기가 혼합하여 지초(芝草)향기가 난다하여 지곡(芝谷)이라 했다 한다.
구치(龜峙) : 벌교읍 고읍리
구치마을은 1400년경에 제주고(濟州高)씨, 청주한(淸州韓)씨 순으로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이름은 뒷산의 지형이 거북(龜)이의 형국의 재(峙)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구치(龜峙)라 했다 한다.
지동(池洞) : 벌교읍 지동리
지동리는 한때 낙안군 고읍면의 지역으로서 못이 있으므로 못골 또는 지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토산리, 중흥리의 각 일부와 고하면의 평촌리, 순천군 동상면의 세곡리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지동리라 해서 벌교읍에 편입되었다. 지동마을은 신석기시대부터 강력한 부족집단이 살았던 것으로 전해오며 이후 흥망을 거쳐 백제시대에 신창맹(新昌孟)씨, 여산송(礪山宋)씨, 달성배(達成裵)씨, 광산김(光山金)씨 순으로 들어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하며, 마을의 이름은 이곳의 지형이 와우형체(臥牛形體)로서 소가 지초(芝草)를 먹고 산다하여 지산동(芝山洞)이라 불리어 오다가 일제시대 행정구역 개편을 하면서 못이 있다하여 못골, 또는 지동(池洞)이라 했다 한다.
퇴산(兎山) : 벌교읍 지동리
퇴산마을은 1720년경에 김녕김(金寧金)씨가 처음으로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이름은 지형이 토끼가 달을 바라보는 옥토망월(玉兎望月) 형국이라 하여 퇴산(兎山)이라 했다 한다.
연동(蓮洞) : 벌교읍 지동리
연동마을은 뒷산 주령(진등)에서 돌칼, 돌도끼,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되고 있는 것으로 미루워보아 신석기시대 때부터 부족 집단이 살았을 것으로 추측되며 그후 진원박(珍原朴)씨, 여산송씨 충강공파(礪山宋氏 忠剛公派) 호덕(好德)이 들어와 지금까지 9대를 이어 오고 있다. 마을의 이름은 예부터 연못에 연꽃이 만발하고 그 모양이 아름다워 연동(蓮洞)이라 했다 한다.
원등(院登) : 벌교읍 지동리
원등마을은 1940년경에 승주군 낙안면 옥산리에 거주하였던 압해정(押海丁)씨, 전주이(全州李)씨, 동복오(同福吳)씨 등이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의 강제노역에 견디지 못하여 이곳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이름은 동으로 낙안천이 흐르고 멀리 고흥의 첨산봉이 보이는 풍요로운 평야지로 여순반란후의 으뜸가는 마을이라 하여 원등(院登)이라 했다 한다.
중흥(中興) : 벌교읍 지동리
중흥마을은 1700년경에 이곳을 지나던 승주군(昇州郡) 동화사(桐華寺)의 스님이 농막(農幕)을 짓고 살았으며 그후 밀양박(密陽朴)씨, 달성서(達成徐)씨, 제주고(濟州高)씨 순으로 들어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이름은 스님이 살고 있는 마을이라 하여 중촌이라 불리어 오다가 홍수로 인하여 마을 앞쪽으로 천(川)이 생겨 물이 흐르게 되자 중촌(中川)이라 하였으며 1950년 당시 마을의 이장인 이병주(李炳柱)가 마을이 크게 부흥되리라는 뜻으로 중흥(中興)이라 했다 한다.
월평(月坪) : 벌교읍 낙성리
낙성리는 한때 낙안군 고읍면의 지역이데 낙승역(낙승역촌), 또는 낙성(낙승)이라 하였다가 융희2년(1908년)에 보성군 고상면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행정리, 강변리, 용동리, 월평리와 가암리, 토산리의 각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낙성리라 해서 벌교읍에 편입되었다. 월평마을은 1640년경에 온양방(溫陽房)씨와 진주강(晋州姜)씨가 들어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이름은 읍내에서 손꼽히는 위대하고 장엄한 백이산(伯夷山 584m)의 여러 영맥(靈脈)의 한줄기의 지맥(支脈)이 힘차게 뻗어내려 반달모양으로 우뚝 솟은 반월산(半月山)을 이루었고 그 반월산 아래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하여 달동네 또는 월평(月坪)이라 했다 한다.
용동(龍東) : 벌교읍 낙성리
용동마을은 1400년경에 김해김(金海金)씨, 진주강(晋州姜)씨 등이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하며 마을의 이름은 백이산(伯夷山 584m)의 줄기가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형국이 마치 용(龍)이 동쪽을 향해 치솟아 오르는 모습으로 용의 꼬리부분에 자리잡고 있어 용동(龍東)이라 불러 오다가 용처럼 씩씩한 기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라하여 근래에는 용동(龍洞)이라 했다 한다.
행정(杏亭) : 벌교읍 낙성리
행정마을은 1700년경에 김해김(金海金)씨, 평강채(平康蔡)씨가 이곳으로 이주해 정착하면서 형성되었으며 마을의 이름은 오래된 살구나무(杏木)가 마을앞에 있어 살구나무 마을로 불러 오다가 언제부터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그늘이 시원하여 이곳에 많은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러 모여들었다 하여 행정(杏亭)이라 했다 한다.
내추(內秋) : 벌교읍 추동리
추동리는 한때 낙안군 고읍면의 지역으로서, 가래나무가 많으므로 가라골 또는 가래골이라 하였는데 융희2년(1908)에 보성군 고상면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백동리, 신촌리, 대판리, 내추리, 가암리의 각 일부와 남상면의 세동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추동리라 하여 벌교읍에 편입되었다. 내추마을은 1780년경에 보성선(寶城宣)씨가 처음으로 정착하였으며 그후 고령신(高靈申)씨, 광산이(光山李)씨, 목천장(木川張)씨, 창녕조(昌寧曺)씨, 문화유(文化柳)씨가 이주해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하며 마을의 이름은 옛날에 무명잣는 가락같이 생긴등을 사이로 밖에 있는 마을을 밖가라골 안에 있는 마을을 안가라골 또는 내추(內秋)라 했다 한다.
외추(外秋) : 벌교읍 추동리
외추마을은 1762년경에 김해인(金海人) 김덕신(金德信)이 처음 입촌하고, 그후 전주인(全州人)이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 마을의 이름은 존제산(尊帝山) 줄기가 내려와 내추와 외추사이의 가락같이 생긴등이 있다하여 가락골이라 불러오다가 가락등에 가래나무가 많이 있어 가래골 또는 추동(楸洞)이라 하였으며 일제시대에는 가락동 밖에 있다하여 외추(外秋)라 했다 한다.
백동(栢洞) : 벌교읍 추동리
백동마을은 170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마을이 번창하여 한때는 100호가 넘는 큰 마을이었다 한다. 마을의 이름은 처음에는 가쟁이(柯亭里)라 불러 오다가 마을 뒷산에 잣나무가 많이 있다하여 백동(栢洞)이라 했다 한다.
세동(細洞) : 벌교읍 징광리
세동마을은 1880년경 광산김(光山金)씨, 문화유(文化柳)씨, 청주한(淸州韓)씨, 창녕조(昌寧曺)씨의 순으로 들어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이름은 뒷산 산상봉에 돌이 많아 돌봉이라 부르고 있는 석봉산(石峰山) 좌측으로 미세한 골짜기를 끼고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여 세동(細洞)이라 했다 한다. 세동마을은 징광리(澄光里)에 속한 마을로 존제산(存帝山)의 한 맥이 기복과 굴곡을 거듭하여 동으로 최동단에 아담한 운치가 서린 석봉산을 등지고 남을 향하여 이루어진 마을로 풍수지리상의 청룡백호(靑龍白虎)와 주작현무(朱雀玄武)가 조화를 이루는 지역으로 심산유곡에서 흐르는 물줄기와 존제산의 중중첩첩한 산 밑으로 펼쳐진 평야는 무한한 발전과 풍요를 기약하는 자연조건이 갖추어진 마을이다.
징광(澄光) : 벌교읍 징광리
징광리는 한때 낙안군 남면의 지역으로서 징광사(澄光寺)가 있었으므로 징광 또는 징괭이라 하였는데 융희2년(1908)에 보성군 남상면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개곡리, 호미리, 사동리, 박강리, 채동리, 세동리 일부와 고상면의 내추리, 굴치리의 각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징광리라 하여 벌교읍에 편입되었다. 징광마을은 1680년경에 징광사가 망한후에 문화유(文化柳)씨가 입촌하였으며, 그후 경주이(慶州李)씨, 밀양박(密陽朴)씨, 광산김(光山金)씨 등이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며, 마을의 이름은 고려시대 징광사가 있었던 곳으로 이후 절이 폐찰되고 민가가 들어와 살게 되면서 징광(澄光)이라 했다 한다.
천치(天峙) : 벌교읍 천치리
천치리는 한때 낙안군 남면의 지역으로서 하느재 밑이 되므로 하느재 또는 천치라 하였데 융희2년(1908)에 보성군 남상면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마화리 온동리의 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천치리라 하여 벌교읍에 편입되었다. 천치마을은 1300년경에 진주인(晋州人) 강원종(姜遠鐘)이 이주해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이름은 옛날부터 마을 뒤로 넘어가는 고개의 길이 보기에는 금방 지나 갈 것처럼 보이지만 가다보면 끝이 없이 높고 멀어 마치 하늘과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여 천치(天峙)라 했다 한다.
마화(馬禾) : 벌교읍 천치리
마화마을은 1460년경에 진주강(晋州姜)씨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하며 마을의 이름은 매화나무가 많이 있다하여 매수리(梅樹里)라 불러 오다가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아름다운 매화나무가 울창하게 있고 꽃 좋고 열매 많은 나무가 있는 아름다운 마을이라 하여 마화(馬禾)라 했다 한다.
금곡(錦谷) :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은 1480년경 남양인(南陽人) 홍인준(洪仁俊)의 아들 홍병(洪武), 홍달(洪達) 두형제가 장흥군에서 이곳을 수시로 왕래하던 중 이곳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이름은 징광산(澄光山) 줄기를 타고 뒷산인 성제(城際)가 우뚝솟아 있어 좌청룡, 우백호로 산줄기가 마을을 감싸고 있고 매봉산인 앞산을 바라보고 있으며 지형이 중의 바랑형국으로 각금곡(各今谷)이라 불러 오다 마을앞 주변에 금(金)과 사금(沙金)이 많이 있다 하여 금곡(金谷)이라 했다 하나 현재는 금곡(錦谷)이라 한다.
칠동(七洞) : 벌교읍 칠동리
칠동리는 한때 낙안군 남면의 지역으로서, 치덕굴 또는 칠동이라 하였는데 융희2년(1908)에 보성군 남상면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이 폐합에 따라 원동리, 구정리, 춘정리, 금곡리와 온동리, 천치리의 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칠동리라 하여 벌교읍에 편입되었다. 칠동마을은 1450년경 남양홍(南陽洪)씨가 처음으로 들어왔으며 그후 1759년경에 해주인(海州人) 최언진(崔彦秦)이 화순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이름은 존제산(尊帝山) 줄기가 동쪽으로 뻗어내려가다 300m 가량의 영봉이 솟아있는데 이곳에 올라가면 멀리 여자만을 관찰할 수 있어 고려 공민왕때부터 조선초기까지 군인이 주둔 하였다 한다. 지금도 산명을 성터로 부르고 있고, 주위에는 성을 쌓았던 많은 돌이 있으며 여기서 서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당시 군량과 마초를 저장한 창고가 일곱동(七棟)이 있었다하여 칠동(七洞)이라 했다 한다.
구정(九井) : 벌교읍 칠동리
구정마을은 고려말엽 김해김(金海金)씨가 처음으로 들어와 살았다고 하나 고증할 길이 없고 그후 1620년경 광산김(光山金)씨가 이주해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이름은 지형이 거북이의 형국이라 하여 구정(龜汀)이라 불리어 오다가 일제시대에 마을에 우물이 아홉군데 있다 하여 구정(九井)이라 했다 한다.
원당(院堂) : 벌교읍 칠동리
원당마을은 1450년경 광산김(光山金)씨가 들어와 정착하였으며 그후 1769년경 해주최(海州崔)씨가 들어와 거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이름은 1500년경 어느 지사(地師)가 지형이 황소가 누워있는 와우형국(臥牛形局)이라 하여 이곳에 터를 잡으면 큰 부자가 될것이라 하였으며, 옛날에는 상당과 하당으로 구분하여 당제를 지내오다 1620년경 하당의 당제는 없어지고 상당마을만 남아 원당(院堂)이라 했다 한다.
마동(馬洞) : 벌교읍 마동리
마동리는 한때 낙안군 남면의 지역으로서 마근대미 또는 마근동, 마동 마음동 등으로 불렸는데 융희2년(1908)에 보성군 남상면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월정리, 도저리와 척령리 죽동리의 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마동리라 해서 벌교읍에 편입되었다. 마동은 상마(上馬), 하마(下馬), 차산(車山)의 세 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마마을은 1640년경에 청주양(淸州楊)씨가 처음으로 들어왔으며 그후 김해김(金海金)씨, 여산송(礪山宋)씨 등이 정착하여 형성되었다하며, 마을의 이름은 뒷산이 말의 형국이라 하여 마동(馬洞)이라 하였으며 윗마을을 상마(上馬), 아랫마을을 하마(下馬)라 했다 한다.
군지(群趾) : 벌교읍 마동리
군지마을은 1739년경에 나그네인 공씨(孔氏)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이름은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옛날 이곳에는 고을의 관청인 부곡이 있었다 하여 군지(群趾)라 했다 한다.
월정(月亭) : 벌교읍 마동리
월정마을은 1780년경 김씨(金氏) 8형제가 이주해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이름은 8형제가 정착하면서 마을 가운데 정자를 지어놓고 가무를 즐기던 중 둥근달이 떠오르자 달가운데 정자라 하여 월정(月亭)이라 했다 한다.
원동(院洞) : 벌교읍 척령리
원동마을은 1680년경 밀양박(密陽朴)씨의 손(孫)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 마을의 이름은 읍에서 1km쯤 떨어져 있는 마을로 부용산이 북풍을 막고 앞에는 칠동천이 흐르고 있는 양지바른 지역으로 옛날에는 글을 읽는 학동이 많이 있다 하여 문천동(文川洞)이라 불러 오다가 조선중기에 이지역을 순찰하던 원님이 자고 갔다 하여 원골 또는 원동(院洞)이라 했다 한다.
금평(金坪) : 벌교읍 척령리
금평마을은 1580년경에 보성선(寶城宣)씨, 청주양(淸州陽)씨가 정착하였으며 그 후 몇 년 뒤에 광산김(光山金)씨 등이 이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이름은 뒷산 중턱에 있는 큰바위가 여덟팔(八)자의 형태를 하고 있어 팔암(八岩)이라 불리어 오다가 1960년 이후에는 벼농사 위주에서 비닐하우스의 원예작물로 고소득을 올려 땅이 금과 같다하여 금평(金坪)이라 했다 한다.
척령(尺嶺) : 벌교읍 척령리
척령리는 한때 낙안군 남면의 지역으로서 잣고개 밑이 되므로 잣고개 또는 척령이라 하였는데 융희2년(1908)에 보성군 남하면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남상면의 팔암리, 원동리, 월곡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척령리라 해서 벌교읍에 편입되었다. 척령마을은 고려말에는 광주정(光州鄭)씨가 집단으로 거주하였으며 이후 조선초기에는 광산인(光山人) 김방(金倣)이 들어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이름은 백제시대에는 청룡리(靑龍里)라 칭하였으며 이후 조선시대에는 마을 뒷산에서 전동으로 넘어간 고개에 잣나무가 많이 있다 하여 백현(栢峴)으로 불리어 오다가 일제시대에 척령(尺嶺)이라 했다 한다.
신기(新基) : 벌교읍 척령리
신기마을은 조선시대에 광산김(光山金)씨, 김해김(金海金)씨가 입촌하고 그 후 전주이(全州李)씨 등이 거주하여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며 이름은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척령리와 동일부락으로 되었으나 중구로 분구되면서 새로운 곳에 터를 잡았다 하여 신기(新基)라 했다 한다.
장좌(長佐) : 벌교읍 장좌리
장좌리는 한때 낙안군 남면의 지역으로 융희2년(1908)에 보성군 남하면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무만, 분토, 월곡, 두평리의 각일부와 남상면의 죽동리 일부지역을 병합하고 장좌리라 하여 벌교읍에 편입되었다. 장좌마을은 고려 문종2년(1048)에 묘향사 영불인 연안보사(連安補寺)가 남하(南下) 장좌도(長佐島)를 점지 속거하라는 지시를 받은 선근(善根)이 하산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며 마을의 지명은 이곳이 옛날에는 조그만 섬으로 신선과, 사람, 부처가 서로 돕고 생활한다 하여 장좌라 하였다는 설과 이곳에 부자(장자)가 살았다 하여 장자 또는 장좌(長佐)라 했다 한다.
분토(粉土) : 벌교읍 장좌리
분토마을은 1600년경에 염씨(廉氏)가 정착하여 살았다 하나 고증할 길이 없고 1820년경에 김해김(金海金)씨가 여천군 남면 화양리에서 이주해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이름은 뒷산이 형성될 당시에는 풀과 나무는 없고 하얀 흙으로 되어 있어 분토(粉土)라 했다 한다.
무만(武萬) : 벌교읍 장좌리
무만마을은 1680년경 광산김(光山金)씨의 손(孫)이 거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며 마을의 이름은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무사(武士)가 만명이 난다하여 무만동(武萬洞)이라 했다 한다.
월곡(月谷) : 벌교읍 장좌리
월곡마을은 1700년경에 김해김(金海金)씨가 처음 입촌한 이후 함양박(咸陽朴)씨 등이 이주해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이름은 지형이 달이 골짜기에서 솟는 형국이라 하여 달곡이라 불러 오다가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산과 계곡 사이에 있는 마을의 모습이 마치 땅굴처럼 생겼다 하여 땅골이라 하였다 한다. 1964년 행정구역 개편과 동시 무만리에서 분구되어 월곡(月谷)이라 하여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두평(斗坪) : 벌교읍 영등리
영등리는 한때 낙안군 남면의 지역으로서 지형이 연꽃처럼 생긴 등성이에 마을이 되었다 하여 연등 또는 영등이라 하였는데 융희2년(1908) 보성군 남하면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두평리, 박석리, 상장리의 각 일부와 흥양군 동면의 하송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영등리라 해서 벌교읍에 편입되었다. 두평마을은 1469년경에 이천인(利川人) 서동제(徐東濟)가 들어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이름은 지형이 삼보산의 월악산을 안고 있어 아담한 마을이지만 들이 협소하고 들의 형상이 옛날에 사용하였던 사각곡용두(四角穀用斗)와 같다 하여 두평(斗坪)이라 했다 한다.
영등(永登) : 벌교읍 영등리
영등마을은 임진왜란 후에 천안인(天安人) 전홍례(全弘禮)가 미력면 반용리 반암마을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설촌하였으며, 그후 두평에서 이천서(利川徐)씨가 들어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이름은 지형이 연꽃처럼 생겼다 하여 연등(蓮嶝)이라 불리어 오다가 마을의 주령(主嶺)이 길게 내려왔다 하여 영등(永登)이라 했다고 한다.
박석(博石) : 벌교읍 영등리
박석마을은 1730년경에 경주최(慶州崔)씨, 천안전(天安全)씨가 이주해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이름은 지리학상으로 이곳의 지하(地下)에 넓은 암반이 형성되어 박석(博石)이라 했다 한다.
봉황(鳳凰) : 벌교읍 영등리
봉황마을은 1890년경에 입촌한 천안전(天安全)씨와 그후 서울에서 박생원(朴生員)이라는 분이 두평에 사는 서도사(徐道士)에게 놀러왔다 이곳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 마을의 이름은 해방이 되면서 영등리에서 분리된 지역으로 마을이 위치하고 있는 지형이 학의 날개 형상이고 대나무가 자라고 있는 지역이 학의 먹이가 되어 봉황이 먹이를 찾아 날아가는 형국이라 하여 봉황(鳳凰)이라 했다 한다.
상장(上長) : 벌교읍 장암리
장암리는 한때 낙안군 남면의 지역으로서 말바우가 있다 하여 말바우 또는 장암(長岩)이라 하였는데 융희2년(1908)에 보성군 남하면에 편입되고 190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하장리와, 제두리의 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장암리라 해서 벌교읍에 편입되었다. 상장마을은 조선 병자호란 당시 밀양박(密陽朴)씨의 처인 오씨부인이 남편이 의병으로 출전하여 김천 싸움에서 사망하자 아들 형제를 데리고 이곳으로 이주해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며 마을의 이름은 이 지역을 감싸고 있는 산맥의 한쪽 끝이 긴 바위로 형성되어 있어 장암이라 하였으며 첫 마을이라 하여 상장(上長)이라 했다 한다.
하장(下長) : 벌교읍 장암리
하장마을은 1600년경에 천안인(天安人) 전백천(全白天)이란 분이 처음으로 정착하였으며 병자호란때 밀양박(密陽朴)씨의 부인이 남편이 김천 싸움에서 의병으로 사망하자 난을 피하여 아들 형제를 데리고 이주해 왔으며 그후 창녕조(昌寧曺)씨와 김녕김(金寧金)씨가 이주해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이름은 이곳에 산세가 암반층으로 길게 뻗어내려 있다 하여 장암리(長岩里)라 하였으며 상장리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하장리(下長里)라 했다 한다.
대룡(大龍) : 벌교읍 장암리
대룡마을은 조선조 임진왜란때에 경주정(慶州鄭)씨가 전북 정읍에서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며 마을의 이름은 뒷산이 와령분주(臥龍奔株)형국이라 하여 대룡(大龍)이라 했다 하며, 자연부락으로 대룡, 현교(顯橋), 산등(山登)으로 이루어져 있다. 옛날에는 장암리로 속해 오다가 일제말에 행정리명을 장암리2구라 하기도 하였다.
대포(大浦) : 벌교읍 대포리
대포리는 한때 낙안군 남면의 지역으로서 큰개가 있다하여 한개 또는 항개, 대포라 하였는데 융희2년(1908)에 보성군 남하면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정동리와 장동리, 제두리의 각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대포리라 하여 벌교읍에 편입되었다. 대포마을은 1823년경에 경주인(慶州人) 정진홍(鄭鎭洪)이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며 마을의 이름은 삼면이 바다로 쌓여있고 연꽃이 마치 호수에 떠있는 모습이라 하여 연호동(蓮湖洞)이라 불리워 오다가 교통과 통신이 불편할 때 여수, 삼천포, 부산을 비롯한 목포, 완도, 군산등지에서 상선을 이용하여 생선을 구입할 뿐 아니라 동부6군은 물론 전북 남원에서도 쪽지게를 지고 상인들이 몰려들어 큰포구를 형성한다 하여 대포(大浦)라 했다 한다.
제두(猪頭): 벌교읍 대포리
제두마을은 1590년경에 천안전(天安全)씨가 처음으로 터를 잡았으며 그후 경주김(慶州金)씨, 동복오(同福吳)씨 등이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하며, 마을의 이름은 지형이 돼지형태와 같이 생겼다 하여 제두(猪頭)라 했다 한다.
연산(連山) : 벌교읍 연산리
연산리는 한때 낙안군 동면의 지역인데 융희2년(1908)에 동화면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흥리, 개화리와 금산리, 연화리, 구기리의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연화와 금산의 이름을 따서 연산리라 해서 동초면에 편입되었다가 1929년 4월 1일 보성군 벌교읍에 편입되었다. 연산마을은 연화(蓮化), 개화(開化). 점촌(店村)의 4개의 자연부락으로 되어 있으며 연화마을은 1830년경에 김녕김(金寧金)씨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이름은 마을 앞 연못에 연꽃이 만발하여 연화(蓮化)라 했다 한다.
금산(錦山) : 벌교읍 연산리
금산마을은 신흥(新興), 산학(山鶴), 금산(錦山), 두지(斗止)의 4개의 자연부락으로 되어 있으며 1800년경에 김해김(金海金)씨가 정착하면서 형성되었다 한다. 마을의 이름은 제석산 아래 골짜기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골안이라 불러 오다가 최근에는 경치가 비단같이 아름다운 제석산 밑에 있다하여 금산(錦山)이라 했다 한다.
봉림(鳳林) : 벌교읍 봉림리
봉림리는 한때 낙안군 동면의 지역으로서 조창(漕倉)이 있었으므로 사창이라 하다가 뒷산이 봉 형국으로 되었다하여 봉림으로 고쳤는데 융희2년(1908)에 순천군 동하면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연화리, 금산리의 각 일부지역을 편입하여 봉림리라 해서 동초면에 편입되었다가 1929년 4월 1일 보성군 벌교읍에 편입되었다. 봉림마을은 기록된 문헌이 없어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구전으로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옛날에는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는 관계로 세미(稅米) 운송에 필요한 선박출입이 용이하여 양곡창고를 중심으로 김해김(金海金)씨가 처음으로 들어왔으며 그후 여러 성씨가 모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전해오고 있다. 마을의 이름은 양곡을 저장하는 창고가 있다하여 사창(社倉)이라 불러오다 뒷산이 봉(鳳) 형국으로 되어 있다하여 봉림(鳳林)이라 했다 한다.
회정(回亭) : 벌교읍 회정리
회정리는 한때 순천군 동면의 지역인데 융희2년(1908)에 순천군 동화면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회천리, 고정리, 상고리의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회천과 고정의 이름을 따서 회정리라 하여 보성군 벌교읍에 편입되었다. 회정마을은 1620년경에 경주김(慶州金)씨, 밀양박(密陽朴)씨가 그 후 해주최(海州崔)씨 여산송(礪山宋)씨 등이 이주해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이름은 보성, 고흥, 광주방면으로 가는 길목으로 돌아가는 제방 형상을 이루고 있어 도랫동 또는 도리동이러 불러 오다 마을 앞에 여자만(汝自彎)의 물이 다시 돌아온다 하여 회천(回川)이라 하였는데 해방후 마을단위로 행정개편이 되면서 회정(回亭)이라 했다 한다.
몰하(沒下) : 벌교읍 회정리
몰하마을은 1890년경에 밀양박(密陽朴)씨 박사윤(朴士胤)이 해은당(海隱堂)을 짓고 생활한 후 김해김(金海金)씨, 경주김(慶州金)씨 등이 거주하던 중에 광복을 전후하여 일본에서 생활하다 귀환한 귀환동포들이 집단으로 들어와 생활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며, 마을의 이름은 귀환민은 다른곳으로 이주해가고 일반인이 살면서 몰밑에 산다하여 몰밑끝 또는 몰하(沒下)라 했다 한다.
고정(高亭) : 벌교읍 회정리
고정마을은 1239년경에 밀양박(密陽朴)씨 신무(信武)공이 정착하였으며 그후 1658년경에 부안임(扶安林) 임경(林庚)이 전주판관으로 있을 때 나라의 명을 받고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선생과 함께 진석리 선수에 양곡을 저장할 창고터를 잡고 돌아오는 길에 잠시 쉬면서 이곳에 정착하라는 윤선도선생의 말에 따라 정착하였다 하며 마을의 이름은 높은 지역에 절이 있다하여 고사리(高寺里)라 불리워 오다가 절이 없어지고 마을이 형성되면서 윗마을을 상고(上古), 아랫마을을 하고(下古)라 했다 한다.
양동(陽洞) : 벌교읍 장양리
양동마을은 1600년경에 경주최(慶州崔)씨, 보성선(寶城宣)씨, 김해김(金海金)씨 등이 들어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며 마을의 이름은 앞이 바로 트이고 양지바른 터라하여 양동(陽洞)이라 했다 한다.
장양(壯陽) : 벌교읍 장양리
장양리는 한때 순천군 동면의 지역인데 1908에 순천군 동하면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양동리, 양촌리, 장동리, 상동리 일부와 초하면의 진석리를 병합하여 장동과 양동의 이름을 따서 장양리라 해서 동초면에 편입되었다가 1929년 4월 1일 보성군 벌교읍에 편입되었다 장양마을은 1590년경에 신라태자태사(新羅太子太師) 칠원윤(漆源尹)씨 시영(始榮)의 30세손 좌승지(左承旨) 상주(商舟) 공이 처음으로 정착하였으며 이후 밀양박(密陽朴)씨순으로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며, 마을의 이름은 제석산(帝釋山) 남단에 와우형국(臥牛形局)에 자리잡은 마을로 뒤로는 투구봉과 칼봉이 우뚝 솟아 있고 동쪽으로는 장군바위, 천마산(天馬山)으로 이어져 있으며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조선선조때에 해남출신(海南出身) 참의 윤선도(參議尹善道)공이 터전을 정하여 주면서 장(壯)하고 빛낼 인물과 거부(巨富)가 출생할 터전이라 하여 장양(壯陽)이라 했다 하며 자연부락으로 양촌(陽村)과 장사동(壯士洞)으로 되어있다.
매산(梅山) : 벌교읍 장양리
매산마을은 조선초 효종(孝宗)때인 1655년경에 좌승지(左承旨)인 칠원인(漆原人) 윤상주(尹商舟)가 처음으로 들어왔으며 그후 밀양박(密陽朴)씨, 성산이(星山李)씨 등이 정착하면서 마을이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 하며 마을의 이름은 뒷산이 옛날에는 투구봉으로 불리는 제석산(帝釋山)의 정기를 받아 장군이 필요로 하는 칼봉(刀峰)과 장군바위와 천마산(天馬山) 아래 싸움터로 칭하는 진치(陣峙)터의 남단에 와우형국(臥牛形局)에 자리잡고 있다 하여 양지포(陽地浦), 또는 양촌(陽村)이라 하여 불러 오다가 1944년 분구되면서 장양5구로 호칭하면서 주산맥이 매화꽃 형상을 하고 있다 하여 매산리(梅山里)라 했다 한다.
쟁동(錚洞) : 벌교읍 장양리
쟁동마을은 1910년경 인근 호동리에서 김길현(金吉炫)이 그후 고흥군 과역에서 이병석(李炳錫)이 이주해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이름은 일제시대 장양리 간척공사시 풍수지리에 능한분이 현재의 마을 어귀에 터전을 정하고 당시 마을의 형국이 마치 징과 흡사하여 쟁골이라 불러 오다가 1958년 행정구역 개편시 진석(眞石)리에 속해있던 마을을 분리하면서 쟁동(錚洞)이라 했다 한다.
진석(眞石) : 벌교읍 장양리
진석마을은 조선숙종 때 김성진(金成振)이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이름은 조선시대 낙안에서 세금으로 거둔 세미(稅米)를 서울로 옮기기 전 수군(水軍)으로 하여금 지키며 운반용 배를 건조하여 만드는 곳이라 하여 선소(船所), 또는 선수(船首)라 불리어 오다가 마을의 뒷산 중턱에서 부싯돌로 쓰던 차돌(참돌)이 나온다 하여 진석(眞石)이라 했다 한다.
호동(虎洞) : 벌교읍 호동리
호동리는 한때 낙안군 초천면의 지역인데 융희2년(1908)에 순천군 초하면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호산리, 상범리 동막리와 초상면의 두미리를 병합하여 호산과 동막의 이름을 따서 호동리라 하여 벌교읍에 편입되었다. 호동마을은 1400년경에 오씨(吳氏), 진씨(陳氏)가 처음 입촌하였고 그후 김해김(金海金)씨, 진주강(晋州姜)씨 등이 들어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이름은 이 지역의 지형이 바다위에 고기와 같은 형국이라 하여 범어(氾漁)라 하였으나 일제시대 이후 뒷산 장구산의 능선이 호랑이 등같이 생겼다 하여 호동(虎洞)이라 했다 한다.
호산(虎山) : 벌교읍 호동리
호산마을은 1659년경에 광산인(光山人) 김여해(金汝海)가 이주해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이름은 지형이 바다위에 뜬 고기와 같은 형국이라하여 범어(氾魚)라 불리어 오다가 지금부터 150여년전 조선 헌종때 지나던 도승이 마을의 지형을 보고 물고기의 형국(魚體)보다는 마을의 뒷산인 장구산의 능선이 호랑이의 등같이 생겼다 하여 호산(虎山)이라 했다 한다.
동막(東幕) : 벌교읍 호동리
동막마을은 조선중엽에 김해김(金海金)씨, 하동정(河東鄭)씨와 동복오(同福吳)씨 등이 이주해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이름은 조선중기에 왕족의 타락과 관료의 부정부패에 견디지 못하던 백성들이 동학군을 조직하여 관군에 대항하다 패하자 뿔뿔이 흩어지고 한 무리가 이곳에 장막을 치고 은거하여 살았다하여 동막(東幕)이라 했다 한다.
대촌(大村) : 벌교읍 장도리
장도리는 옛날에는 낙안 그후에는 여수군 돌산면의 지역으로서 섬의 형태가 노루형으로 되어있다 하여 장도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고흥군 동강면에 편입되었다가 1983년에 보성군 벌교읍에 편입된 지역으로 4개(장도, 지주도, 해도, 오동도)의 유인도와 17개의 무인도로 되어있다. 대촌마을은 1500년경에 여양진(驢陽陳)씨가 처음으로 정착하였으며 그후 남평문(南平文)씨, 진주강(晋州姜)씨, 광산김(光山金)씨, 밀양박(密陽朴)씨 순으로 이주해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 마을의 이름은 노루형의 장도에서 제일 크다하여 대촌(大村)이라 했다 한다.
부수(浮水) : 벌교읍 장도리
부수마을은 1540년경에 여양진(驢陽陳)씨가 처음으로 정착하였으며, 그후 진주강(晋州姜)씨, 김해김(金海金)씨 등이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 마을의 이름은 지형이 시신이 물위에 뜬 형국이라 하여 부시(浮屍)라 불러 보다가 지금은 지형이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형국이라 하여 부수(浮水)라 했다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