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암 나철 - 민족종교 대종교의 중광자

나철은 1863년(철종 14년) 벌교읍 칠동리 금곡 마을에서 태어났다. 1892년 문과에 합격해 훈련원 권지부정자 직을 지냈다. 1905년 을사위약에 분개하고 도미하여 미국정부에 한국독립을 호소했으나 당시 일본 공사 방해로 실패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이등박문 등 정계 요인들에게 동양평화와 한국의 독립보장을 요구하다 역시 실패했다. 을사 5적인 박제순 일당을 제거하고자 1905년 폭발물 선물상자를 보냈으나 미리 폭발되어 실패한 후 200여명의 장사를 모집하고 권총등을 구입해 1907년 두차례를 거사하였으나 사전 누설로 체포되어 귀양중에 광무황제의 특명으로 풀려났다. 평소 단군을 신앙하며 항일 투쟁을 하다가 1910년 대종교를 중광해 만주에서 30만의 신자를 확보하고 10여개소의 학교를 세워 민족사상을 고취시키는 등 독립운동에 힘썼다.
1916년 구월산에서 일제의 폭정을 통탄하며 54세를 일기로 자결하였고, 아들 둘은 목단강 형무소에서 망국의 한을 품은 채 옥사했다. 정부에서는 그의 충열을 빛내기 위해 1962년 건국훈장을 추서하였다.
박광전 - 칠순 노령으로 의병을 일으킨 유학자
박광전은 중종 21년(1526)조성면 용전리에서 태어났으며, 이퇴계의 문인으로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던 대 유학자로서 광해군의 사부를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격문을 띄우고 문인들과 더불어 의병을 모집해 전라 좌의병을 일으켰다. 또한 전란극복을 위해 백성들을 위무하고 유민을 모아 농사를 짓게 해 민생을 안정시키는 등 우국충정을 몸소 실천했다. 1597년 정유재란시에도 칠순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의병을 일으켜 적벽전투에서 적을 격파하였다. 그러나 노병으로 인해 군영에서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후 사후에도 평소 그의 학덕과 충의를 흠모했던 지방 유림들에 의해 서원이 건립되고 숙종 33년(1707)에 용산서원의 사액을 받았다.
비조 박유전 - 판소리 서편제의 비조
박유전은 조선 헌종 1년(서기 1835년) 전라북도 순창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왼쪽눈을 다쳐 불행하게도 애꾸가 되었고 보기흉한 외모 때문에 밖에서는 놀림을 받고 집에서는 천덕꾸러기로 자랐다고 한다. 박유전은 어려서 보성에 이주해 살았는데 지금의 보성군 보성읍 대야리 강산마을에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박유전의 부친도 명색 소리꾼이었기에 그의 형에게 소리공부를 시키고 그에게는 땔나무를 하게 하였으나 담너머로 귀동량해 독공한 소리가 그의 형보다 뛰어나 그후 소리를 배우게 되었다 .이후 박유전은 심청가의 완성과정에서 애절한 가락을 보다 많이 가미하고 조곡을 재조정해서 슬픈대목을 더욱 슬프게, 비창한 장면은 더욱 처절하게 다듬질하였는데 이같은 창제를 서편제라 했다. 25세에 전주부 통인청 대사습에 나가 심청가로 장원하고 전라감사의 주선으로 상경해 대원군을 만나게 된다. 대원군은 그의 기예에 감탄하여 강산이라는 호와 무과 선달의 첩지를 내리고 금토수와 오수경을 선물하였다.
그후 대원군의 실각으로 귀향한 박유전은 1906년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가 죽은 후3일동안 밤이면 마을 뒷산에서 「내 소리 받아 가라」는 혼백의 외침이 있었다한다.
백홍인 - 호남 항일운동의 중심이 된 학자

백홍인은 1874년 웅치면 유산리 부춘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열 살 때부터 학문을 익히기 시작하여 1899년 유학자 최익현에게 사사하였으며, 고향인 부춘마을에 장춘재를 건립하여 후진양성에 힘썼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항일 국권 회복을 위해 의거하여 창이격문(倡義檄文)인 경고서사(敬告書社)를 호남 각지에 배포하였다. 이후 의병을 모집하여 호남 전 지역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그 후에도 칠서(七書)를 암송 교수하여 독립정신을 깨우치고 많은 후학을 배출시키시고, 1952년 79세를 일기로 타계하셨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로를 빛내기 위하여 1980년 건국공로 대통령표창과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서재필 - 독립운동가이자 민중운동가

서재필은 1864년 문덕면 용암리 가내마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이곳에서 보내다 7살 되던 해에 서울에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등과 교류하면서 부터 개화사상에 감명받아 신문물에 심취하게 된다. 1884년 갑신개혁을 주도해 3일 천하를 이룬뒤 이의 실패로 망명하여 미국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의학박사가 되었다. 1896년 귀국하여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국민을 계도하는 한편 독립협회를 결성하고 독립문을세워 민주 훈련을 쌓게하면서 민중운동을 이끌어 우리나라 근대화에 공헌했다.(※ 4.7독립신문 간행을 기념해 이날을 신문의 날로 지정함) 특히 그는 독립협회를 통해 토론회와 강연회, 상소활동, 집회 및 시위등의 주도로 반외세의 자주 독립과 반봉건의 민주화를 계몽하다 다시 망명길에 오르게 되는데 해외에서 자신의 사재를 바쳐 가며 독립운동을 추진하다가 1951년 병석에서 우리나라의 명운을 통탄하며 85세를 일기로 서거 하였다.
한편 송재 서재필선생 기념사업회가 1991년 설립되어 그의 고향인 문덕면 용암리에 기념사업을 펴고 있다.
이순신의 벗, 보성인 선거이
선거이(宣居怡, 1550년 ~ 1598년)는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자는 사신(思愼), 호는 친친재(親親齋)이다. 본관은 보성으로 용문면(보성읍)에서 태어났으며 보성선씨 시조 선윤지(宣允祉)의 8세손이다.
1569년에 선전관으로 등용되고, 1570년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1586년에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일(李鎰)의 계청군관으로 함경도에 배치되어 그곳에서 충무공 이순신을 만났다. 1587년 녹둔도에서 조산보 만호 이순신과 함께 여진족을 막는 공을 세웠으며, 1588년에는 거제현령, 진도군수를 역임하였다. 이어 청백(淸白)으로 성주목사를 거쳐 1591년에 전라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이순신과는 가장 가까운 전우였으며, 나이는 이순신보다 5살 어렸지만 계급은 7등급이 앞서갔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초기에 이순신의 휘하에서 한산도 대첩에 참전하여 승전했고, 그해 12월에는 전라도병마절도사로서 독산산성에서 일본군과 분전하는 권율을 도와, 행주산성으로 넘어가도록 도와주었다. 다음해인 1593년 2월에는 행주산성전투에 참가하여 권율이 적을 대파하는 데 공을 세웠다.
1594년 9월에는 이순신과 함께 장문포(長門浦)에서 일본군을 맞아서 승전, 이어 충청도수사가 되고 다음해 황해도병사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남해·상주 등지에서 활약하였으며, 1598년 제2차 울산성 전투에서 2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양호(楊鎬)를 도와 싸우다가 울산서에서 전사하였다.
1605년 선무원종공신일등(宣武原從功臣一等)에 추봉되고 보성의 오충사에 제향되었다.
붓끝에 일생을 바친 설주 송운회
송운회는 고종 11년(1874년) 율어면 금천리에서 출생하여 한말의 혼돈기, 일제의 강점기와 민족의 비극 6.25를 체험 하면서도 글씨 외에 한순간도 눈을 팔지 않았으며, 1965년 임종때 까지도 붓으로 藝道(예도)를 실천했던 脫俗雄筆의 대가 였다. 어려서부터 영재 이건창의 門下에서 兄 明會(號 小波, 文章家 시인)와 함께 학문과 서예를 익혔고, 이때부터 中國과 우리나라 名人들의 필법을 두루 섭렵하는 한편 明나라 文人 董基昌의 필법에 심취 했다. 설주는 5체에 모두 능했으나 주로 해, 행, 초서를 썼으며 그의 진초는 『仙의 경지에 이른 神筆』이라고 평 받았다. 또한 광복전의 鮮展, 그후의 國展 등에서 그의 작품을 인정받을 기회가 많았지만 서력이나 나이에서 후진들에게 평가 받을 수 없다는 자존심과 강직한 성품으로 野人 으로 남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선비이다. 말년에 이르러서도 『글씨를 쓸 수 없는 날이 바로 내생명이 다하는 날』이라는 생각으로 일관했고 주위로 부터는 『보성 강물이 온통 설주 선생의 붓 행구는 먹물』이다 라는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그가 세상을 뜨기 하루 전 가족들 앞에서 화선지에 큰 붓으로 「一心」이라는 두 글자를 남기고 낙관을 새기지 못한 채 자리에 누웠다는 그는 나이 여섯 살에 붓을 잡은이래 92세로 임종할 때 까지 88년간 오로지 글씨에만 정진해 왔다. 그의 서예 세계를 일컬어 어느 서예가는 『백로 한 마리가 강을 건너 하얀 선을 그으며 날아가는 것 같다.』고 평한 것을 보면 설주의 작품 세계를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설주의 예술 세계는 아들 槿庵(작고), 손자 雪岡, 조카 雪坡, 종손 小汀, 春舫에 이어지면서 보성 설주의 예술혼을 밝게 하고 있다.
독특한 서체를 연 송곡 안규동
1907년 복내면 반석리에서 태어난 송곡은 8세에 사헌 김윤기로부터 학문을 익히기 시작, 13세에 한해가 한학자 이낙천의 문하에 입문했다. 18세에는 설주와 효봉에게 서예를 배워 한학과 글씨에 대한 자질을 일찍이 키운 그는 한때 정치에도 뜻을 두었으나 1950년 이후 고향에 돌아와 한학과 서예에 정진했고. 1964년 부터는 국전을 통해 서예계에 입지를 굳혔다. 송곡의 글씨는 「부드럽고 우아하며 덕스럽고 다사로운 모습의 행서, 순탄하고 홀가분하며 질기고 거침없는 멋갈의 초서, 새롭고 고우며 고르고 둥그러움이 바램으로 나타난 전서, 바르고 아름다우며 어엿하고 꾸밈없이 알찬 한글로서 이것이 곧 "송곡체"라 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담살이 의병장 안규홍
- 본관 : 죽산
- 자 : 제원
- 호 : 담산
- 출생지 : 전라남도 보성군 보성읍 우산리 택촌
- 생몰 : 1879. 4. 10~1910. 6. 22
- 시대 : 고종~일제강점기
- 정의 : 독립운동가(항일의병장)
- 훈격 : 건국훈장 독립장
자는 제원이요 호는 담산이며, 별명은 계홍(桂洪) 또는 안담살이, 담살이로 불리웠으며 본관은 죽산으로 1879년(고종 16) 4월10일 午山 문강공 안방준의 10대손이요 처사인 달환의 셋째 아들로 보성읍 우산리 택촌 마을에서 태어난 공은, 태어난 시기부터 성장시기가 조선왕조 말기 이래 대한제국 시기를 거쳐 일본제국주의 침략으로 식민지 지배라는 민족수난 시대에 살면서 호남지역의 의병항쟁을 이끌었던 항일투사로서, 공은 어려서부터 천성이 강개하고 유희에 항상 전진(전장에서 진을 치고 싸우는 수단)의 조련을 하니 世人들이 장래에 장수가 될 것이다라고 평하였다. 그의 선조는 7대조까지 대대로 문무관직에 오른 집안 이었으나 이후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하고 그의 대에 와서는 몰락하여 비천한 신분으로 떨어졌으며, 더욱이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편모슬하(偏母膝下)에서 가세(家勢)가 빈한하여 남의 집 담살이로 모친을 봉양하는 효자였다. 그러나 당시 일제가 1894년(고종31) 청일전쟁(淸日戰爭)에 승리한 이후 갑오농민항쟁(甲午農民抗爭)을 탄압하더니 1895년(고종32)을미사변(乙未事變)을 거쳐 1904년(고종41. 광무8) 러일전쟁을 종결지은 다음, 1905년(고종42.광무9)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고 1907년(융희1, 丁未)에는 정미늑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정규군을 해산하므로써 정치적 예속화를 기도하는데 대하여 지사(志士)들의 구국의 함성이 높아가자, 공도 일제 침략정책에 대한 심한 대일적개심을 갖고 1908년(융희2) 2월 거의를 위해 ‘일심계(一心契)’를 조직하여 동지들을 규합하고 법화사의 ‘자위단’을 주축으로 봉기할 생각으로 양반 유지들에게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자신의 신분 때문에 냉담한 반응이었다.
이에 공은 보성 부근에서 활약하고 있는 강성인의 의병부대에 투신하여 그의 휘하에서 활약하였으나 강성인의 의병부대가 주민들의 재물을 탈취하는 등 의병활동에서 벗어 난 행동을 하고 주변으로부터 신망을 잃게 되자 공은 강성인을 총살하고 염재보, 손덕호 등의 추대로 의병대장에 취임한 뒤 부대를 재편하고 본격적인 항일전을 전개하게 되었으니 그 부대의 편제로는, 부장 염재보, 참모장 송기휴, 선봉장 이관회, 좌우익부장 정기찬·장재모·송경회·손덕호, 유격장에 안택환·소휘천, 좌우부참모에는 오주일·나창운, 서기 임정현, 포량관 박제현으로 편성하고, 1908년 2월 동소산(문덕면 동산리 법화마을 뒷산)에서 거의하여 보성을 중심으로 인근지역의 흥양(고흥)·여수·돌산(여수)·곡성·남원·구례·장흥·순창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일제의 군경을 상대로 항일투쟁을 벌였다.
같은 해 3월 26일 파청(득량면 예당1리 버들고개, 일명 구현:비들고개)에서 잠복하고 있다가 낙안에서 파견된 최강을 자랑하는 나가토·히라이 두 부대를 습격하여 전멸시키고 다량의 무기와 서류를 탈취하였으며, 또한 진산(문덕면 귀산리 진산마을)전에서 승전한 후 원봉(복내면 복내리 원봉마을)에 주둔하고 있는 기마주둔소를 기습하여 적 50여명을 사살하고, 같은 해 3월 29일에는 일본군 헌병대가 대원사(문덕면 죽산리)를 접근해 오므로 매복작전으로 적군 8명을 사살하고 2명에게 부상을 입히는 전과를 올렸다. 공의 의병부대가 강성해지자 일본군이 동복(화순군 동복면)을 수비하기 위해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부대를 화순군 운월치(화순군 동복면)로 유인하여 매복전으로 일본군 30여명을 사살하고 무기와 서류를 노획하는등 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1908년(융희 3) 5우러 19일 서봉산(보성군 복내면 진봉리) 전투에서 일본군의 포위 공격으로 참모 나창운을 비롯한 의병 25명이 전사하는 치명적인 참패를 당혀어 두 달 남짓 남해의 섬에서 은거하다 8월경 미력면 석호산에서 토착민들과 의병장 심남일, 안재찬 등의 후원으로 재기하여 그 해 8월 광양으로 진군하여 어업권을 장악한 일본 어민들과 측량대를 습격하였으며, 일제의 밀정인 일진회원과 소속 관리들을 처단하여, 9우러 13일에 순천에 주둔한 일본군을 가령치로 유인하여 격전을 벌였으나 선봉장 이영삼과 이관회, 유격장 안택환 등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어 잠시 부대를 해산한 뒤 은둔생활을 하다 1909년(융희 3) 3월 의병항쟁을 재개하였다.
의병부대를 해산하라는 고종황제의 밀칙을 받았으나 일제의 간계임을 간파하고 호남행군소대장이라는 이름하에 의병들을 통솔하고 같은 해 3월 8일 전해산, 심남일 의병부대와 연합작전을 전기하여 나주 남평 거성동 전투에서 일본군 헌병 70여명을 사살하는 대승을 거두고 4월까지 보성·장흥·강진·화순 등지를 진군하여 일본 군경 및 부일 매국노를 처단하여 명성을 크게 떨쳤다. 위기를 의식한 일제는 같은 해 4월 조선주둔일본군사령부는 광주와 남원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을 차출하고 9월 1일부터 남해대토벌작전을 시작하여 10월 말까지 보병 2개연대, 공병 1개소대를 비롯한 군함 수 척, 해군 11정대 등이 동원되는 대병력으로 의병을 섬멸하려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 가운대세도 부석촌 대좌가 이끄는 보병 제20연대는 공의 부대를 전담하여 공의 부모, 처자에게 귀순을 종용케 하는 선무공작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의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8월 29일 밤 간부회의를 소집하여 일시 의병부대를 해산하기로 합의하고 1909년 9월 25일 의병부대를 해산한 공도 부장 염재보, 좌우익장 정기찬 등과 같이 고향으로 가는 길에 밀고자에 의해 문덕면 동산리 법화마을에서 체포되어 광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대구 형무소로 이감되어 1910년 6월 22일 교수형에 처해져 한을 남기고 순국하였다. 그 후 득량면 예당1리 파청에 의사안공파청승첩비를 세우고 광주 충효당에 배향하였다. 정부에서는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호남 사람의 종장 우산 안방준
안방준은 선조 6년(1573)에 보성읍 우산리에서 출생하여 11세때 박광전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영남학파와 기호학파를 넘나들며 폭넓은 학문적 교류를 가졌을 뿐 아니라 15세에 이대원전을 짓는 등 학문에 진력하였다. 20세 되던해 임진왜란시에는 스승 박광전의 의병에 참여해 군무를 협찬하는 등 전란극복에 힘쓰면서도 항의신편, 호남의록 등 충정사적을 저술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때에는 64세의 노령으로 의병을 모았는데 외지에서도 많은 의사들이 모였는바 이는 우산의 명성과 학문의 영향력을 보여준 좋은 예이다. 만년에 조정에서 내려진 벼슬을 모두 사양하고 후학 양성에 전념하다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이조판서가 사직되고 문강의 시호가 내려졌다.
예술혼을 가진 불꽃 화가 양수아
조선시대 문인화의 거장이며 호남 화단의 원조인 양팽손 선생의 15세손으로써 한국 피카소라 불려진 양수아는 1920년 겸백면 은덕리에서 났다. 그림에 남다른 재질을 가진 그는 일본의 전쟁화가로 유명한 미야모토의 문하에서 삽화를 공부하며 기와바다 미술전문을 나왔다. 1948년 오지호 화백의 영향으로 아카데믹한 구상회화가 주조를 이루었던 호남 화단에서 파스텔로 그린 추상화전을 가져 충격을 주었던 그는 6.25이후 지리산에 입산 함으로써 자유를 차단 당한채 방황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인간다워야」함을 강조했던 양수아는 1972년 지병으로 운명하였다.
의병 운동에 앞장선 보성의 茶人 일봉 이교문
이교문은 19세기 한말(1846~1914) 전남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에서 태어났다. 노사(蘆沙) 기정진 문하에서 10년간 수학하였으며, 26세에 성균관 장의를 지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하자 노사 문인들의 토적창의(討賊倡義) 선봉으로 섰으며, 1906년 최익현이 항일창의격문(抗日倡義檄文)을 전국에 배포하고 태인에서 거병하자, 의병 21명을 인솔하고 이백래‧ 양회일 등과 함께 화순 쌍봉사에 호남의병창의소를 설치 군율사감장(軍律司監將) 역을 수행했다.
이후 안규홍 의병장에게 군수물자를 제공하면서 의병활동에 적극 가담한 사실이 탄로 되어 외경에 체포된 후 혹독한 고문으로 순명할 때까지 불구가 된 비운의 선비였다. 일봉유고(日峰遺稿)를 남겼는데 총 8권으로 되어 있다. 평생 교류한 인물은 판서 김성근, 정언, 민치량, 승지 이건창, 김윤식(홍암 나철 선생 후견인), 의병장 송사 기우만, 면암 최익현 등 당대의 석학들이다. 1895년에 지은 茶詩 (啜茶 :차를 마심) 二首는 불후의 명시로 정찬주 작가의『다인 기행』에서 보성의 茶人으로 소개되었으며, 보성 녹차 박물관과 봇재 현관에 게시되어 있다.「일봉 이교문 선생의 철학 사상과 시문학 연구」논문집이 있으며, 그는 유학자, 서예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가족으로는 조선 왕조 실록 보성 편에 나오는 인물(암행어사가 보성의 진사 이지용을 등용해줄 것을 조정에 청하다)로 석성 현감을 지낸 이지용(李志容)이 부친이며, 또한 보성의 인물 중 나비 화가 석전 이희순은 손자, 송재 서재필은 내종 사촌, 손녀딸이 전서의 대가 허소의 며느리가 되었기에 그와는 사돈이 된다.
묵매로 대변되는 구당 이범재
만년에 주로 서울에서 활동했던 구당은 1910년 보성읍 옥암리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10살때인 1919년 서당의 학동으로 스승을 따라 독립만세를 부르기도 했다. 지방 유지로서의 덕망이 높아 민선읍장을 지낸 그는 의제 허백련의 문하에서 서예와 사군자를 익혔고 연진회장을 지냈다. 국전에는 특선 1회 입선 2회를 끝으로 더 이상 출품하지 아니하였다. 1993년에 타계한 후 1994년 금호 문화회관에서 그의 유작전이 있었는데 그의 묵매는 따를 사람이 없는 것으로 평가된다. 이와 함께 서예가 선종석, 백일인, 김여중이 일가를 이루었을 뿐 아니라 설주 선생의 제자 우당 문태석은 행·초에 능했으며, 선비로서 끝까지 갓과 도포를 입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나비로 일가를 이룬 석전 이희순
한국화가 이희순은 1893년 문덕면 용암리에서 출생하였다. 화순의 송사호선생에게 서사하여 나비 그림으로 일가를 이뤘기에 일명 "이나비"로 통했다 한다. 한때 미력면 도개리에서도 작품활동을 했던 그는 평생을 그림에만 전념 하다1950년 생을 마쳤다.
좌의병장 임계영
1552년(明宗 7년)에 태어나 1576년 문과에 급제하시고 진보현감(眞寶縣監)으로 출사하셨으며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공이 전라좌도 의병장에 추대되어 성주, 개령, 거창 등지에서 왜군과 싸워 크게 전공을 세우셨고 그해 10월에 진주성 방어전에서 대승하였다. 이후 크고 작은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시고 전쟁이 끝난 후 양주, 정주, 해주, 순창 등지에서 목사(牧使)을 역임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때 노병으로 기병하지 못함을 한탄하다 같은해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임기를 마친 후에는 고향에 내려와서 후학들을 가르치며 학문과 병법에 몰두하셨다.
서화에 모두 능하였던 임양재
임양재는 헌종 13년(1848년) 보성읍 보성리에서 태어났다. 서화에 모두 능하였는데 소치 허유에게 화법을 배워 묵란에 뛰어났으며 문장에도 능하여 당대의 대문장가 영제 이건창과 교유하고 여규형과도 시를 주고 받았다고 한다. 1912년 66세를 일기로 타계 했다.
묵석동 전투의 영웅 임창모
임창모 의병장은 보성 출신으로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데 대한 분을 참지 못하던중 의병을 일으켜 선봉장으로 활약했다. 1907년 동북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어 15년 유배형을 받았으나 후에 유배에서 풀려나자 호남창의소에 참여 중군도통장으로 활약하면서 주로 독립부대를 지휘해 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 뒤 안규홍 의병대와 함께 투쟁을 계속하였으나 고종황제의 의병대 해산령으로 전국의 모든 의병활동이 중지되었으나 잔여병력을 모아 끝까지 싸우던 중 1909년 아들과 함께 복내면의 묵석동 전투에서 장렬히 산화하였다.
전방삭 - 보성을 지켜낸 선무원종공신 어모장군

1545(인종 1년) 미력면 반룡리 반암마을에서 태어나셨다. 1575년(선조 8년) 무과에 급제하여 1592년(선조 25년) 훈련원부정 건공장군이 되었다. ‘지리지형을 이용한 전술을 연마하여 조직전열을 가다듬고자’ 하던 뜻을 이루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와 우국충정 열혈청장년을 모아 전술을 연마하여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였을 때 왜군에 대항하여 싸웠다. 이후에 보성, 순천, 광양, 고흥 등지에서 20여회의 대소 전투를 전개하였다. 1598(선조 31년) 죽전벌(득량면)에서 밀려오는 왜군과 분투하였다. 이날 선두에서 지휘하여 대승을 거두었으나, 왜군의 비탄에 맞아 순절하셨다.
1600년(선조 33년) 그의 충절을 높이 사 선무원종공신 2등에 녹훈(錄勳)하고 훈련원정 어모장군으로 추증하였으며 충절을 후세에 남기고자 녹권(錄券)을 후손에게 하사하였다.
송계 정응민 - 초승달같이 행신하라
1896년 보성군 회천면 영천리 도강 마을에서 태어난 정응민은 그의 백부 정재근에게 소리를 배웠다. 정응민을 통해 서편제에서 발전한 강산제에 동편제 소리가 어우러지고 다시 중고제 특유의 경제가 조화된 이른바 보성소리가 탄생하게 된다. 이것은 정응민의 보성소리가 서편제에 속하면서도 동편제의 춘향가를 별도로 보존하는 계기가 된다. 소리꾼이 하대 받던 시절 정응민은 보기드물게 선생의 칭호를 받았고 마을 사람들은 회의를 열어 그에게만은 공대를 하기로 했다는 일화가 있는데 이는 윤판서 댁에서 배웠던 한학을 기초로 제자를 가르쳤고 「초승달 뜨면 달을 향해 큰절하고 초승달 같이 행신하라」며 제자들에게 엄중하였던 그의 처신에서 비롯된 듯 하다.
불멸의 노래로 다시 살아난 민족음악가 채동선
바이올리니스트요, 작곡가요, 음악사상가로서 민족정신을 실천한 음악가 채동선은 1901년 벌교읍 세망리에서 출생했다. 당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채동선은 제일교보(현 경기고)에 유학하면서 바이올린을 배우게 된 것이 음악에 빠지게 된 계기이다. 1919년 3·1운동 가담으로 퇴학을 당하고 도일해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려다 적성에 맞지 않는다 하여 독일에서 바이올린과 작곡을 공부하고 1929년 귀국해 바이올린 독주회와 실내악 운동을 펴면서 연희전문에서 바이올린을 교수한다. 그는 강의 외에는 창작과 바이올린에 열중하면서 한복에 두루마기, 고무신을 신고 낮에는 농사꾼으로 밤에는 국악채보에 전념하는 등 민족음악 수립의 기초를 쌓았다. 주위의 친일 권유에도 불구하고 창씨개명도 거부한 채 은둔하다가 광복이 되자 고려음악회를 창설해 관현악, 합창, 취주악 활동도 활발히 한 그는 부산 피난 생활 중 얻은 신병으로 1953년 삶을 마감했다.
그가 남긴 불멸의 노래, 부활의 가곡인 「고향」, 「향수」, 「압천」등은 우리 가슴속에 아름답게 새겨져 애창된다. 특히 그의 가곡은 6·25때 납북된 천재시인 정지용의 시에 붙여져 한동안 빛을 보지 못하였으나 뒤늦게나마 정부가 1995년 9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함으로써 우리고장을 빛낸 쾌거가 되었다. 벌교 공원에는 정지용 시에 곡을 붙인 대표작 「고향」이 친필 악보대로 새겨지고 작품목록이 수록된 기념비가 서 있다.
모의장군 최대성
보성군 겸백면 출신의 최대성은 임진왜란 당시 훈련원정의 신분으로 난이 일어나자 이충무공의 막하로 들어가 한후장이 되어 남해의 곳곳에서 승첩을 거두는데 큰공을 세웠다. 정유재란때는 관군의 와해로 호남일대가 도탄에 빠지자 향병 수천을 모집 광양, 순천, 고흥 등 곳곳에서 이십여차례의 접전을 벌여 모두 승첩을 계속하던중 우리군 득량면 송곡리에서 왜적의 비탄에 맞아 무술년(1598년) 6년 8일 그의 나이 45세로 두눈을 부릅뜬 채 전사하였다. 지금도 그가 숨진 득량면 삼정리 삼거리를 군두라 명하고 있으며, 그의 치적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 유적복원 사업을 92년부터 시작하였다.
전서의 대가 허소
자호를 담수(더벅버리 노인)라고 즐겨썼던 허효봉은 고종19년(1882년) 득량면 오봉리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주위의 칭찬을 받았다 한다. 자라서는 경사에 밝고 시, 서, 화에 심취해 여러차례 선전에 입선 함으로서 화단에 필명을 날렸다. 그의 글씨는 새의 발자국과 같은 기이한 체로서 특히 백수복이 유명하다 당대의 명필가이자 이조판서를 지낸 석촌 운용구도 「압록강 동쪽에서 가히 겨를 사람이 없겠다」는 말로 효봉의 글씨를 찬탄했다 한다. 평생 한거하면서 가야금과 글씨를 즐긴 그는 1942년 61세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