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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회 죽천 선생의 흔적을 찾아서 - 화산재, 신도비, 묘소, 용산서원 유허비

등록자
김세곤
작성일
2012.04.30 09:17
조회수
5735
박근효묘.jpg
죽천묘소_보성군_겸백면_사곡리.jpg

제41회 죽천 선생의 흔적을 찾아서
 
  - 화산재, 신도비, 묘소, 용산서원 유허비
 

 
죽천 박광전 선생의 흔적을 찾아 다시 보성을 간다. 먼저 가는 곳은 보성군 겸백면 사곡리에 있는 화산재이다. 화산재는 죽천 박광전의 제실이다. 제실 입구에서 문강공 죽천 박선생 유적 안내문을 읽는다. 안내문에는 ‘이곳에 죽천 묘소와 신도비, 부조묘와 종택이 있다.’고 적혀 있다.
 
 
화산재로 들어갔다. 화산재 현판은 주자학의 창시자 회암 주희(1130-1200)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화산재 마루 벽에는 ‘죽천선생제실’이라는 편액이 붙어 있고, 퇴계 이황이 죽천 박광전과 헤어지면서 건네 준 이별시 5수, 광해군의 사제문, 그리고 1707년에 숙종 임금이 용산서원에 사액을 내릴 때 지은 사제문 편액들이 걸려 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이 편액들이 모두 한자로 되어 있어 내용을 잘 알 수 없다는 점이다. 한글로 번역된 글을 한 곳에 비치하여 두면 좋겠다.
 
 
이어서 부조묘(큰 공훈이 있어 영원히 집안의 사당에 모시고 제사를 받는 신위)를 보러 간다. 부조묘는 화산재 오른편에 있는 사당에 모시어져 있다. 돌계단을 올라 사당으로 들어간다. 문을 열고 죽천 선생의 신위를 보았다. 신위는 두 개가 나란히 있다. 왼편에는 죽천의 신위, 오른편에는 부인 문씨의 신위가 있다. 신위 앞에서 간단히 제를 드리었다. 이어서 마루에서 ‘죽천집 석판’을 보았다. 석판 글씨가 선명하다.
 
 
화산재를 나와서 죽천 선생 묘소로 간다. 묘소는 마을 뒷산에 있다. 화산재에서 오른 편으로 1분 정도 걸어가면 길가에 신도비가 있다. 신도비 뒤는 대나무 숲이다.
 
신도비 글은 1918년 11월에 간재 艮齋 전우 田愚 (1841∼1922)가 지었다. 조선의 마지막 성리학자 전우의 글은 안방준이 지은 행장과 더불어 가히 명문장이다. 전우는 글씨도 잘 썼다. 전주 한옥마을에 있는 강암 송성용 서예관에서 전우의 글씨를 본 적이 있다. 죽천정 한문 글씨도 전우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죽천정 현판에는 집간재자 集艮齋字라고 적혀 있다.)
 
신도비는 한문으로 되어 있어 웬만큼 한자를 알아서는 이해 할 수가 없다. <국역 죽천집>에서 신도비명을 찾았다.
 
 
신도비명 처음 글은 ‘죽천 박선생이 1597년 11월18일에 세상을 뜨니 광해군 때(1610년) 좌승지를 추증하고 숙종 때(1707년)에 용산서원의 편액을 내렸다. 헌종(1835년) 때에는 이조판서를 추증하였으며 1841년에는 문강공 文康公 이라는 시호를 내렸다.’로 시작하여 죽천의 생애와 가계 그리고 죽천에 대한 그간의 평가들을 정리하고 마지막에 명문 銘文이 적혀 있다. 신도비명銘을 읽어보자.
 
 
상제가 백성에게 내린 속마음은
오직 인 仁과 의 義라네.
참으로 순수한 기질이 아니라면
누구라서 그 참된 본성을 보존하리
 
환히 빛나는 박선생이여
타고난 기품이 매우 뛰어나
하늘의 명과 성인의 도를
어려서부터 발휘하였도다.
 
속수(涑水 : 북송의 유학자 사마광을 말함)의 참 마음을
더욱 가슴에 새겨 실천하니
커다란 근본이 이미 서고
그 도가 곧 생겨났다네.
 
문순공(퇴계 이황의 시호)의 바른 학문을
선생이 전수받았으니
직 直 자의 참된 요결은
멀리 주자로부터 나왔도다.
 
소학과 가례로
기초를 다져서
늙어서도 더욱 독실하게
삼가 스승의 법도를 따랐네.

효도는 시종 변하지 않았고
충성은 죽음을 아끼지 않았노라고
한천(도암 이재 李縡의 다른 호)이 찬송하였으니
여덟 글자로 다 표현한 것이라
 
인이나 의에 대해
선생은 부끄러움이 없었으니
역대 임금께서 포상하여
관작을 올리고 시호를 내렸도다.
 
이 비를 무덤길에 세워서
내려주신 은총을 빛내고
내가 명문 銘文을 아로새기니
영원토록 부서지지 않으리라.
 
 
신도비명에 나오는 인물 중 사마광 司馬光(1019 ~1086)은 중국 송나라의 학자 · 정치가 · 시인으로 <자치통감>을 편찬하였으며, 개혁가 왕안석 王安石의 급진적인 개혁에 반대하는 당파인 구법당 舊法黨을 이끌었다.
 
 
‘효도는 시종 변하지 않았고 의리로 임금을 떠받들었으며 충성하여 죽음을 아끼지 않았노라’고 죽천을 찬사한 이재 李縡 (1680 숙종 6∼1746 영조 22)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그는 창협의 문인인데 대사헌 겸 대제학을 한 노론의 영수이고 죽천을 모신 용산서원의 원장을 하기도 하였는데 1738년 겨울에 죽천의 묘갈명을 지었다.
 
신도비를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오른편에 들판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10미터 정도 가니 묘소들이 여러 개 보인다. 여기에 죽천의 묘소가 있다. 죽천 묘소는 위쪽에 있다. 죽천과 부인 문씨 두 분이 같이 합장된 묘소 앞에는 ‘문강공 죽천박선생지묘 증 정부인문씨 부 祔’라고 적힌 비석이 있다. 그 옆에는 묘표가 두 개 있고 석등과 망주가 세워져 있다. 묘표는 오래된 것과 최근에 세워진듯한 것 두 개이다. 죽천과 부인 문씨의 묘소는 정유재란 시절이라서 화순 동복에 묻혔다가 2년 후에 이곳에 안장되었다. 이때 광해군이 지원을 하였다.
 
 
죽천 묘소 바로 아래에는 박광전의 큰 아들 만포 晩圃 박근효(朴根孝:1550-1607)의 묘가 있다. 그는 1591년에 진사에 합격하였는데 아버지 박광전을 따라 의병을 일으키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병세가 위독하자 임계영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참모관이 되었다. 묘 앞에는 “통훈대부 장수현감 증 사헌부 집의 만포 박공 근효지묘”라고 비석이 세워져 있다.
 
 
 
다음으로 답사할 곳은 용산서원 유허비이다. 이 유허비는 보성군 미력면 덕림리 우와실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져 있다. 큰 도로변에 있어 찾기가 쉽다.
 
먼저 용산서원 유허비 안내문을 읽어 본다.
 
대룡산 기슭에 있었던 용산서원은 문강공 죽천 박광전 선생의 도학과 절의를 추앙하여 제향을 드렸던 곳이다. (중략) 이 도학과 절의의 정신을 길이 전하기 위해 문인 門人 은봉 안방준, 난곡 정길 등은 1607년에 도내에 통문을 발송하고 사림과 협의하여 선생이 평일에 강학했던 대룡산 우와곡 동편 기슭에 서원을 세웠다.
 
1707년(숙종 33)에 비로소 용산서원이라는 액호가 하사되었으며 수암 권상하가 초대원장으로 지낸 후 장암 정호, 도암 이재, 매산 홍직필 등 국내의 석학들이 줄곳 서원을 관장해 왔으나, 불행하게도 1871년(고종 8) 조정의 명령으로 서원이 훼철되어 쓸쓸한 잡초 밭으로 변하였다.

1987년 후학과 후손들이 협력하여 유허로 가는 길이 궁벽함으로 이곳에 유허비를 세웠는데, 비문은 단운 민병승이 지었고 글씨는 서원의 편액을 쓴 취몽헌 오태주의 글자를 모았다.
 

용산서원은 고종의 부친인 흥선대원군에 의하여 훼철되어 빈터만 남아 있다. 그 대신 1987년에 세워진 용산서원 유허비가 그 허전함을 지키고 있다. 유허비의 비문은 이조참판 겸 시강원 보덕 벼슬을 한 민병승이 1929년에 지었는데, 비문에는 도학과 경륜의 학자이고 국난 극복에 앞장선 죽천 박광전 선생을 모신 서원이 철폐된 것에 대한 탄식이 오롯이 배어 있다.
 
한편 박씨 문중에서는 서원을 다시 짓는다고 한다. 서원이 복설되어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아끼는 죽천 박광전 선생의 인의 정신이 고양되길 기대한다.
 

  김세곤 (역사인물기행작가, 한국폴리텍대학 강릉캠퍼스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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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