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회 죽천, 왕자사부가 되다.
- 등록자
- 김세곤
- 작성일
- 2012.04.19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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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회 죽천, 왕자사부가 되다.
-광해군과의 인연
죽천은 1580년에는 동빙고 별좌에 제수되어 한 번 사은숙배하고 돌아왔다. 이 때 선조 임금께서 중전이 아들을 낳지 못하여 대를 이을 적통이 없었는데 사저에 있는 왕자 임해군(1574-1609)과 광해군(1575- 1641, 재위 1608-1623)이 취학하게 되자 재주와 학행이 특출한 사람을 잘 가려 뽑아 사부로 삼을 것을 명하였다. 1581년에 죽천은 왕자사부로 선발되었고, 하락 河洛은 부사가 되었다. 이 때 임해군이 7세 광해군이 6세이었다.
왕자들은 사저에서 박광전과 하락에게 교육을 받았다. 왕자에게 강의 할 때마다 하락은 많은 글을 읽도록 힘썼고 박광전은 글을 정밀하고 명확하게 이해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다시 말하면 하락은 왕자들에게 다독 多讀을 지도하였고 죽천은 정독 精讀하도록 가르친 것이다.
어느 날 선조 임금이 왕자의 일과를 살펴보고 말하기를 “글 읽는 것만 탐닉하면 글의 뜻을 명확히 알지 못하게 되니, 마땅히 박사부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고 하였다.
하루는 선조 임금이 죽천을 불러 술을 하사하였다. 죽천은 원래 술 마시는 것을 즐겨 하지 않아 임금이 주신 은잔의 술을 반만 마시고 땅에 부었다. 임금이 하사한 술을 다 안마시고 땅에 붓다니! 어쩌면 망극한 일을 한 것이다. 내시 內侍 승전 承傳(임금의 뜻을 전달하는 일을 하는 벼슬아치)이 이를 사실대로 아뢰었다. 며칠 있다가 선조는 왕자에게 물어 보기를 “박사부는 술을 마시지 못하느냐?” 하니 왕자는 “천성적으로 마시지 못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술로 인하여 덕을 잃은 사람이 많으니 마시지 못하는 것도 또한 잘된 일이 아니냐?” 하고, 죽천에게 자색과 홍색의 명주를 각각 한 단씩 하사하였다. 술로 말미암아 실덕을 한 조선의 재상들이 한 둘이 아니다. 필자가 알기로는 송강 정철도 그 중 한사람이다. 정철은 선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술 때문에 선조로부터 미움도 받았다.
1582년 1년 동안 죽천은 왕자사부로 계속 근무하였다. 그가 왕자를 가르치면서 일어난 에피소드가 여럿 있다. 하루는 왕자가 궁중의 일을 토로하려 하자, 죽천이 말하기를 “마땅히 정성을 다해 효도하고 공손하여 자식의 직분을 행 할 뿐이요, 이외에 궁중의 일을 신은 들을 수 없습니다.” 하니, 왕자는 이후 입 밖에 내지 않았고 실의에 젖은 표정으로 절하고 물러갔다.
또 이런 일이 있었다. 왕자가 머리를 모두 주옥으로 장식하였다. 죽천은 이를 보고 왕자에게 “부녀자도 그렇게 하는 것이 옳지 않는데 하물며 남자가 이런 사치스런 물건을 쓰는 지요?”하였다. 이에 대하여 왕자는 궁으로 들어가 유모에게 머리에 장식한 주옥을 풀어 버리도록 하였다. 유모가 말하기를 “상서롭지 않는 재액을 없애기 위하여 궁중에서는 예부터 이 일을 행해온 것인데 어떻게 갑자기 없애려 하십니까?”하니, 왕자는 “사부의 말씀이 있었는데 내가 어찌 감히 따르지 않겠느냐?”하고 스스로 머리에서 주옥을 풀어 버렸다.
일화를 더 살펴보자. 왕자의 외가에서 사찰에다 금표(출입금지 표시)를 세워 그 이익을 독차지 하였으나, 관아에서는 이를 금지 시킬 수 없었다. 권력 실세 앞에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무력한 것이 공권력인가 보다. 죽천 박광전이 이를 듣고 왕자에게 아뢰기를, “사찰은 왕자의 사유물이 아닌데 어찌하여 일반인 출입을 금지시키십니까? 이는 비록 작은 일이지만 실로 의리를 크게 해치는 일입니다.”하였다. 왕자가 크게 놀라서 말하기를, “저는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하고 곧장 궁중에 들어가 물어보니 죽천의 말이 사실이었다. 왕자는 그 고을에 유지 諭旨를 내려 금표를 철거하도록 하였다.
1583년 여름에 죽천은 임기가 만료되어 감찰을 제수 받았다. 죽천은 만 2년 반을 왕자사부로 일한 것이다. 광해군은 6세부터 시작하여 8세까지 죽천과 하락으로부터 공부를 배웠다. 세 살 버릇 여든 까지 간다는 속담이 있듯이 어릴 적 공부는 평생 그 사람의 인성에 영향을 미친다.
1583년 겨울에 죽천은 전라도 함열현감에 제수되었다. 죽천이 길을 떠나려고 왕자에게 아뢰니 왕자가 수심에 잠긴 표정으로 강가에 까지 와서 전송하려고 하였다. 죽천은 “왕자는 사사로운 일로 성 밖을 드나들 수 없습니다.”하고 사저에서 이별하였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1593년 12월에, 박광전은 광해군을 전주 감영에서 만난다. 이때 광해군은 왕세자가 되어 무군사 撫軍司를 이끌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소강상태에 있을 때 세자 광해군은 군사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남쪽으로 내려온다. 광해군은 12월25일에 전주에 도착하였다. 68세의 박광전은 병든 몸으로 전주로 달려갔다. 세자 광해군은 그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이 자리에서 박광전은 광해군에게 시무책 10조문을 올린다. 이 시무책의 핵심은 국난을 극복하기 위하여는 우선에 민생이 안정되어야 하고, 백성들이 농사를 지어 식량을 생산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만남이 죽천과 광해군과의 마지막 만남인 듯하다.
한편 죽천 박광전이 별세하고 광해군이 1608년에 즉위한 이후 광해군은 자신의 사부인 죽천과 하락 등에게 은전을 베풀고 죽천을 증직한다. 이는 <광해군일기>에 나와 있다.
광해 10권, 즉위년(1608년) 11월 27일
하락 등의 집안에 후히 돌보아주는 은전을 시행할 것을 전교하다
전교하였다. “옛날 내가 대군으로 있었을 때 사부였던 하락(河洛)·박광전(朴光前) · 민응기· 정운룡 · 권우 등이 모두 지도의 수고가 있었는데, 불행히 세상을 떠났다. 세시(歲時)에는 그 고을 수령으로 하여금 그 집안을 찾아 위문하고 제물을 주어 후히 돌보아주는 은전을 시행하라고 경상도와 전라도 감사에게 글을 보내도록 하라.”
광해 112권, 1617년 2월 25일
하선과 박춘수에게 상당한 직의 제수를 명하다
전교하였다. “고 사부(師傳) 하락(河洛)의 손자 하선과 박광전(朴光前)의 손자 박춘수에게 상당한 직을 제수하라.”
광해 144권, 1619년 9월 10일
궁궐 역사에 재목, 돌 등을 상납한 자에게 보상하다
전교하였다. “두 궁궐터의 가옥주인과 재목·돌·돈을 바친 사람들을 낱낱이 자세히 살펴서 모두 실직에 제수하라. (중략)
내가 세자로 있을 때 사부로 있던 고 박광전의 장손 박춘호(朴春豪)를 모 찰방으로 제수하고 성호의 아들 성여기(成汝機)에게도 실직을 제수하라. 이곽의 아들 이두망은 죽었으므로 그의 아우 이두창을 수령으로 제수하라. (후략)
이렇듯 광해군은 어릴 적 사부인 죽천을 극진히 우대한다.
또한 추가로 그의 직위도 올려주고 사제문도 보낸다.
광해 29권, 2년(1610 경술) 5월 19일
잠저시의 사부 하락, 박광전 등에게 증직하고 삼가 현감 윤영현은 승진토록 하다
전교하였다. “내가 잠저 시의 사부 중에 고인이 된 하락 (河洛)·박광전(朴光前)·성호· 민응기·정운룡· 권우 등에게 각기 원래에 받은 직책 위에 당상의 실직을 제수하고, 이곽에게는 찬성을 추증하되, 각기 교서를 만들고 관리를 보내어 제사지내게 하라. 삼가현감(三嘉縣監) 윤영현은 승진시켜 서용하도록 하라.”
이 교지에 따라 죽천은 추증된다. 사제문을 보면 죽천은 1610년(경술년)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보성군 겸백면 화산재 마루에는 광해군이 보낸 사제문(賜祭文) 편액이 붙어 있다. 이를 읽어 보자. 사제문은 해서체 글씨로 되어 있어 한문 읽기가 편하다.
사제문
광해 경술 증관시 지제교 미상, 은종사구학 .... 한제기숙은...
은나라 고종은 옛날 배우던 때를 생각하여
제위에 오르자 마자 스승을 찾아 흠모하였고
한나라 명제는 오래된 학은을 기억하여
벽옹에 행차하던 날 존경을 표하였네.
스승을 높이는 것은 고금에 빛나는 일이니
벼슬을 내림에 어찌 유명 幽明(저승과 이승)을 구분하겠는가.
아! 공은 호남의 영재로
고귀한 인품에 명망이 높아
잠저의 초년을 맞이하여
왕자사부 자리에 뽑히었도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