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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회 죽천, 46세에 출사하다

등록자
김세곤
작성일
2012.04.17 15:15
조회수
4686
첨부파일(1)
죽천정노동면광곡리.jpg

 
제3부 죽천, 출사 出仕하다

       
제37회  죽천, 46세에 출사하다
              -경기전 참봉, 헌릉 참봉         
                         

   1571년 9월4일자 <선조실록>에는  전라감사 유희춘이 박광전 등 63명의 선행을 선조에게 올리는  내용이 실려 있다.

  선조 5권, 1571년 9월 14일
 
  전라감사가 박광전 등 63명의 선행을 계본하다

  전라감사가 박광전등 63인의 선행에 대한 계본(啓本: 임금에게 올리는 문서)을 조정에 올리니, 예조에서 임금의 재가를 하였다. 예조의 계목(啓目)에는, 박광전 등 6인에게는 우선 상당한 관직을 제수하도록 청하였는데 임금의 윤허를 받았다.


   1570년(경오년)에 미암 유희춘은 호남을 시찰하면서 관내에 훌륭한 인물들을 찾아내었다. 박광전도 이 명단에 포함되었는데 유희춘은  박광전에 대하여는 “어버이를 모심에 지성으로 효도하고 모친상을 치르면서 예를 다하고 몸가짐에 법도가 있고 사람을 가르침에 게으르지 않았다”고  조정에 보고하였다.

유희춘은 1571년 2월에 전라감사가 된다. 그해 9월에 유희춘은 전라도 사람들 중에 선행이 있는 인물들을 찾아서 조정에 보고한다. 이 명단에는 박광전이 맨 앞 순위로 들어 있다. 


그러면 미암 유희춘(柳希春 : 1513∼1577)에 대하여 알아보자.
그의 자는 인중(仁仲), 호는 미암(眉巖)이고 해남 출신이다. 아버지는 유계린(柳桂鄰)인데 김굉필의 제자이었다. 어머니는 무오사화, 갑자사화의 희생자인 강직한 선비 금남 최부 崔溥의 딸이다. 아내는 면앙 송순과 친척인 여류시인 송덕봉이고, 하서 김인후(金麟厚)와는 사돈 간이다.(유희춘의 아들과 김인후의 딸이 부부이다.)


  그는 김안국· 최산두의 문인으로서, 이황과도 친하였다. 그는 1538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1544년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뒤 수찬 · 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1545년 을사사화 때 명종의 외삼촌 윤원형의 오른 팔인 임백령이 인종의 외삼촌 윤임 일파 제거에 협조를 요청했으나 응하지 않아서 윤원형의 미움을 샀다. 이리하여 그는 1547년 양재역(良才驛) 벽서사건(정미사화라고도 한다)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곧 함경도 종성에 안치되었다. 그는 그 곳에서 19년간을 보내면서 독서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이 때 국경 지방에는 글을 아는 사람이 적었는데, 그가 교육을 하여 글을 배우는 선비가 많아졌다. 1565년 충청도 은진에 이배되었다가,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석방되었다. 선조는 그를 복직시켜 응교 · 교리 등의 벼슬을 하다가 대사성 · 부제학 · 전라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전라관찰사 재임기간은 1571년 2월부터 10월까지 9개월간이었다.

  1575년에 예조 · 공조 참판을 거쳐 이조참판을 지내다가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말년에 그는 담양군 대덕면에서 살았다. 그는 경전, 역사, 사상에 널리 해박하여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라고 불리었다. 저서로는 ≪미암일기≫ · ≪속몽구 續蒙求≫ · ≪헌근록 獻芹錄≫·≪주자어류전해 朱子語類箋解≫등이 있으며, 편서로 ≪국조유선록 國朝儒先錄≫이 있다.

유희춘의 흔적은 담양군 대덕면에 있는 미암 사당과 미암일기를 보관한 모현관 그리고 연계정에서 찾아 볼 수 있고, 광주광역시 광산구에 있는 무양서원에는 금남 최부와 함께 유희춘의 신위가 모시어져 있다.   

   한편  1571년 9월 조정의 지시에 따라 전라감사 유희춘은 박광전을 경기전 慶基殿 참봉으로 특별 채용한다. 참봉은 종9품인데 요즘 같으면 행정서기보이다. 이때 죽천의 나이는 46세이었다. 만학에 출사한 것이다. 경기전은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어진 御眞을 봉안 한 곳인데 관원으로 종5품 영 1명과 종9품 참봉 1명을 두었다. 죽천은 개혁적으로 일을 한다. 당시에 경기전 후원에는 꽃과 과일이 많아 창기 娼妓와 잡다한 무리들이 밤낮으로 놀이터로 사용해 온 지가 오래되었다. 죽천은 “경기전 안에는 태조 임금의 어진이 모시어져 있으니 더럽힐 수 없다” 하고 단호히 놀이를 금지하니 재실이 정숙하여졌다.


   1573년에 죽천은 헌릉 獻陵 참봉에 임명되었다. 헌릉은 조선 제3대 임금 태종과 그의 비 원경왕후 민씨의 능이다.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에 있다. 죽천은 소위 능참봉 일을 맡게 되었고, 비로소 서울에서 생활하게 된다.

   죽천은 능참봉을 하면서 정말 성심껏 일을 한다. 정각(임금께서 제사를 드리는 제각)을 말끔히 청소하고 능졸들을 돌보고 구휼하였다. 이러자 같이 일하던 관리들이 그를 고깝게 보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향기로운 풀과 악취 나는 풀은 한 그릇에 섞을 수 없다.”고 죽천을 공박하였다. 죽천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전부터 이곳의 읍재(邑宰 : 능의 책임자를 지칭 한 듯함)는 참봉과 서로 짜고 헌릉에서 사냥하여 포획한 것을 나누어 가졌다. 하루는 읍재가 사람을 시켜서 죽천을 불렀는데 이 자리에서 죽천을 회유하였다. 죽천은 상사의 회유를 거부하였다. 그는 “능침은 사냥하는 곳이 아니며, 이권이 따른 일에는 더욱 따를 수 없다.”고 말하며 사냥을 허락하지 않았다. 죽천, 정말 강직하다. 

   이래저래 두 해가 흘렀다. 1575년에 죽천은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오랫동안 서울 생활을 하다 보니 연로한 아버지를 모시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죽천이 그만 둔다는 소식을 듣고 헌릉을 지키고 있던 사졸들이 노인과 아이들을 이끌고 나와서 작별인사를 하였다. 어떤 사람은 술을 들고 와서 전별하고 또 어떤 이는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죽천은 고향에 돌아와서 아버지를 잘 봉양하였다. 잠 잘 때도 허리띠를 풀지 않았으며 몸소 약을 달이었다. 그런데 1577년 11월에 죽천은 부친상을 당한다. 그리고 상례에 따라 한결같이 3년 상을 모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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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업데이트
2026.0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