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회 죽천, 퇴계와 편지 왕래를 하다.
- 등록자
- 김세곤
- 작성일
- 2012.03.19 10:25
- 조회수
- 6148
첨부파일(1)
-
주자절요전권.jpg
26 hit/ 1.20 MB

제33회 죽천, 퇴계와 편지 왕래를 하다.
퇴계의 <주자서절요 서>는 계속 이어진다.
옛 성인의 가르침에는 시ㆍ서ㆍ예ㆍ악(樂)이 모두 있지만, 정주(程朱)가 칭송하여 기술할 때 <논어>를 가장 학문에 절실한 것으로 삼은 뜻도 역시 이와 같다. 아아, <논어> 한 책으로 너끈히 도에 들어갈 것인데, 지금 사람은 이 책에 대해 다만 읽고 말하기만을 힘쓰고 도를 구하기를 생각하지 않는 것은, 이익에 유혹되어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은 <논어>의 뜻은 있으나 유혹하여 빼앗는 해는 없다. 그러면 장차 배우는 자로 하여금 감발하고 흥기하여 참으로 알고 실제로 행하는 것을 일삼으려 하는 자는 이 글을 버리고 어찌하겠는가. 공자의 말에, “학자가 나아가지 못함은 도의 문에 들어갈 곳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그 맛을 즐거워할 줄 알지 못함이다. 그 들어갈 곳이 없음은 마음을 비우고 뜻이 겸손하여 번거로운 것을 견디고 다스리기를 즐기지 않는 까닭이다.” 하였으니,
지금 이 글을 읽는 자가 진실로 능히 마음을 비우고 뜻이 겸손하기를 부자의 훈계와 같이 하면, 자연히 그 들어갈 곳을 알게 되고 그 들어갈 곳을 얻은 후라야 그 맛을 즐길 것을 아는 것은, 맹자의 말에 고기[芻豢]가 나의 입을 즐겁게 함과 같이 될 (추환 芻豢은 꼴을 먹여 기르는 소나 염소의 고기를 말한다. 맹자의 말에 “이의(理義)가 나의 마음을 즐겁게 함이, 추환의 고기가 나의 입을 즐겁게 함과 같다.”라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주자의 이른 바 큰 규모의 엄한 심법[嚴心法者]도 거의 힘쓰게 될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겉으로 통하고 바로 오르면, 이락(伊洛)을 거슬러 수사(洙泗)에 달하여[정자(程子)를 거슬러 공자(孔子)의 학문에 도달한다는 뜻이다. 정자가 사는 낙양에는 이천(伊川)과 낙수(洛水)가 있고, 공자가 사는 노(魯)나라에는 수수(洙水)와 사수(泗水)가 있다.) 가히 옳지 않음이 없으니, 앞에서 이른바, 성경(聖經)과 현전(賢傳)은 과연 모두 나의 학문이 될 것이니, 어찌 편벽되게 이 한 글만 숭상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내가 늙어 상유(桑楡 황혼)에 가깝고 궁벽한 산에서 병들어 전에 배우지 못한 것을 슬퍼하고 전현이 남긴 자취를 깨닫기 어려움을 개탄하였다. 그러나 구구(區區)하게 단서를 연 것은 실로 이 글에 힘입음이 있다. 그러므로 감히 남들의 지목함을 돌보지 않고, 스스로 뽑아 모아서 동지에게 고하고, 또 뒤에 오는 자를 무궁하게 기다리려고 함이다.
가정(嘉靖) 무오년(1558, 명종13) 여름 4월 모일에 후학 진성(眞城) 이황은 삼가 서문에 쓴다.
퇴계의 서문을 여러 번 읽었지만 <주자대전>과 <주자서>에 관련된 글이라서 내용이 너무 어렵다. 이해가 잘 안 된다. 하지만 요지는 어느 정도 알겠다. 다른 책과 자료들도 함께 읽으면서 요점 정리를 한다.
1543년에 퇴계 이황은 <주자대전 朱子大全 >을 구하여 읽었다. <주자대전>은 중국 송대(宋代)의 성리학자 주희(朱憙:1130~1200)가 평소에 지은 시· 문류(詩 · 文類)를 전부 모아 편찬한 문집으로 무려 100권 이상 된다. 인터넷 백과사전에서 찾아보니 주자대전은 1265년에 편찬한 문집으로 121권(원집 100권, 속집 11권, 별집 10권)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은 원제목은 〈회암선생주문공문집 晦庵先生朱文公文集〉인데 〈주자문집 朱子文集〉·〈주자문집대전 朱子文集大全〉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상은의 <퇴계의 사상과 학문>책과 인터넷 백과사전에는 주자전서의 편찬자는 원집 100권은 주희의 아들 재(在)가 편찬하고, 별집은 여사로(余師魯)가 편찬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퇴계 이황의 서문에는 두 왕씨(王氏)와 여씨(余氏 : 여씨는 여사로를 말한다.)가 편찬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상은은 그의 책에서 ‘퇴계는 황용의 별집 서에 의거 두 왕씨가 원집을 편찬하였다고 하였으나, 가정 11년 임진간본의 반황의 발과 성북19년 간본의 황중소지를 보면 편자는 주자의 아들인 주재 朱在임이 분명하다’고 밝히고 있다. (이상은 책, p96 주 28)
다음은 <주자서>에 대한 설명이다. <주자전서> 가운데에 주자가 당시 공경대부(公卿大夫)와 문인, 그리고 친구와 왕래한 편지가 모두 48권에 이르는데, 이 편지 모음집이 바로 <주자서 朱子書> 이다. 그 내용은 주로 의리를 강명하기 위한 학문적인 것과 성리학 공부에 관한 것, 사생활에 대한 문답, 출처 · 퇴진 문제에 관한 것, 고전의 재해석 · 재평가에 관한 것 등으로서 <주자전서> 분량의 약 1/3을 차지한다.
그러면 <주자서절요 朱子書節要>는 어떤 책인가? <주자서> 중에서 퇴계가 필요한 부분을 가려서 뽑은 책이 바로 <주자서 절요>이다. 주자서 절요는 주자가 주고받은 편지 중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지를 발췌하여 만든 책이다. 절요란 말은 요긴한 것을 골라서 줄인다는 의미이니, 원문 그대로 전개하는 것이 아닌 간추린 글이다.
서간문은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집약해 상대에게 전달하는 것이어서 당대의 유종(儒宗)이라는 존경 받던 주희의 학문과 사상도 이 서간문에 모두 함축되어 있다. 이황은 이러한 점에 주목, 주희의 서간문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 중에서 시사(時事)에 맞지 않는 것과 학문과 관련이 없는 부분을 빼고 정주학의 핵심이 된다고 인정되는 성리학 경전 연구, 정치·사상 등에 관한 내용만을 추려서 이 책을 완성하였다. ≪논어≫가 공자와 제자들의 문답을 모은 성현서로 인정되어 공자를 배우는 중요한 길이 ≪논어≫임과 마찬가지로 이 책도 주희를 배우는 소중한 자료이며, 주희를 이해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책이다.
본래 이황의 <주자서절요> 편찬 본은 이황의 서 序에 나와 있듯이 14권 7책이었다. 그런데 죽천에게 준 <절요>는 15권 8책이고, 나중에 후학 문인들이 추가하여 20권 10책이 되었다.
20권의 내용을 분류하면, 권1·2는 시사출처(時事出處), 권3은 왕장문답(汪張問答), 권4는 여유문답(呂劉問答), 권5는 진육변답(陳陸辨答), 권6은 문답론사(問答論事), 권7은 문답경전(問答經傳), 권8∼18은 지구인문답(知舊人問答), 권19는 속집, 권20은 별집으로 되어 있다.
한편 죽천은 퇴계가 준 <주자서절요>를 열독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 책을 정독하면서 궁금한 것은 그냥 지나치지 않고 퇴계에게 편지로 질문하였다. 퇴계도 죽천의 질문에 일일이 답하여 준다.
퇴계의 답서중 하나를 읽어 보자. 이 편지는 죽천이 퇴계에게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묻고 약초를 보내고, <주자서 절요>의 내용 중 의문 나는 부분을 물은 데 대한 답서로 추측된다. 이 편지는 <퇴계집> 내집 권 15에 ‘상사 박광전과 수재 윤흠중에 답한 편지’에 수록되어 있다. 퇴계의 편지를 읽어 보자.
헤어진 뒤 그대를 늘 생각하는 마음이 자리를 함께 했던 날 보다 더 했는데, 이렇게 편지를 보내주니 어찌 기쁘고 위로가 되지 않겠는가? 황(이황을 말함)은 며칠간 성묘하는 일로 추위를 무릅쓰고 출입하느라 몹시 피곤하여 누웠으나, 여러 가지로 약을 달이고 섭생하여 겨우 다른 병은 면하였다네. 부쳐준 지황은 매우 감사히 받겠네. 다만 몸이 이미 피폐해져 구구한 약의 힘으로도 효험을 얻기 어려울까 두려울 뿐이네.
보내준 편지에서 십한 十寒이라 한 말은 참으로 그러하네. 대저 도는 넓고도 넓으니 아디서부터 손을 대겠는가? 오직 성현들이 남긴 교훈이 바로 손을 대야 하는 곳인데, 그 중에서 지극히 절실하고 지극히 요긴한 것을 구하기는 <주서 朱書>보다 앞서는 것이 없을 것이네.
이전에 지은 보잘 것 없는 시구를 몇 자 고쳐서 별지로 보내드리네.
이 편지를 읽어 보면 죽천이 앞서 편지를 보낸 것이 확인된다. ‘보내준 편지에서 십한 十寒이라 한 말은 참으로 그러하네.’ 라는 대목이 그 증거이다. 십한十寒은 십한일폭十寒一曝의 준말로, 열흘 춥고 하루 햇볕을 쬔다는 의미이다. 일을 하는 데 근실하지 못하여 자주 중단함을 말할 때 이 표현을 쓴다.
그런데 아쉽게도 죽천이 퇴계에게 보낸 원본 편지는 남아 있지 않다. 이 편지가 남아 있었더라면 두 사람의 편지 왕래의 전후 사정을 보다 확연하게 알 수 있을 것인데 너무 아쉽다.
한편 퇴계는 자신이 지은 시를 아는 사람들에게 보내기를 매우 좋아 하였다. 그리고 답시를 받으면 더욱 흐뭇해하였다.
예를 들어, 사단칠정논변을 1559년부터 1566년까지 8년간이나 한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1527-1572)의 경우는 퇴계가 매화 시 8수를 고봉에게 건네고 다시 고봉이 차운 시를 지어 퇴계에게 보낸 에피소드가 남아 있다. 퇴계는 1569년 3월4일 선조 임금에게 사직 인사를 하고 도성을 떠나 동호의 몽뢰정에서 묵었다. 그리고 다음날 배로 한강을 건너 봉은사에서 묵었는데 고봉은 봉은사까지 따라와서 이별의 정을 나누었다. 이 때 퇴계는 그가 쓴 매화 시 8수를 고봉에게 주면서 화답해 달라고 한다. 고봉은 1569년 3월 15일자 편지에 화답하는 매화시 8수를 동봉하여 퇴계에게 보낸다. (이 차운 시는 <고봉 집 속집 1권>에 퇴계 시 원운과 함께 실려 있다.)
그런데 죽천이 퇴계로부터 이별 수 5수를 받고나서 차운 시를 지어서 퇴계에게 보낸 기록은 없다. 죽천이 워낙 성리학에 몰두하여 시는 많이 안 지었을까. 아니면 기록이 유실되었을까. 아무튼 참 아쉽다.
김세곤 (역사인물기행작가, 한국폴리텍 대학 강릉캠퍼스 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