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회 죽천, 퇴계와 헤어지다.
- 등록자
- 김세곤
- 작성일
- 2012.03.08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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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회 죽천, 퇴계와 헤어지다.
- 퇴계, 죽천에게 이별 시 5수를 지어주다.
1566년 겨울에 퇴계 이황의 문하에 나아가 제자의 예를 갖춘 죽천은 학업을 어느 정도 마치었다. 박광전은 오랫동안 부모님을 돌보지 못했기에 하직하고 다시 보성으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이 때 퇴계는 죽천에게 <주자서 절요>한 질을 주면서 “만년에 좋은 벗을 만났는데 갑자기 헤어지게 되었으니 어찌 말이 없을 수 있겠는가?”라 말하였다. 또한 5수를 지어 헤어지는 마음을 표현하며 말하기를, “외인(불교의 스님이나 도교의 도사)의 도에 뜻을 두지 말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죽천과 퇴계가 이별한 시기는 아마도 1567년 초가 될 것이다. 죽천은 집에 돌아와서 2월에 퇴계가 준 <주자서절요>의 서문 발문을 지었다.
그러면 퇴계가 죽천을 보내면서 지은 이별시 5수를 살펴보자.
시는 7언 절구 다섯 수이다.
제1수
병든 몸은 험하고 머리는 백발로 가득한데
신음하는 속세의 나, 무엇을 구하려 하는가?
원컨대 장차 서툰 재주와 늦은 명성으로
넘치는 빛을 완상하다 죽어서야 그치리.
病骨巉巉雪滿頭 병골참참설만두
呻吟塵蠹欲何求 신음진두욕하구
願將拙用兼聞晩 원장졸용겸문만
把玩餘光至死休 파완여광지사휴
제1수는 당시 퇴계의 삶을 조명하는 듯하다. 서툰 재주는 퇴계 자신을 낮추는 말이고, 늦은 명성은 명종임금이 자꾸 벼슬을 내려서 서울로 올라오게 한 것을 말한다. 퇴계는 1566년 봄에도 공조판서 벼슬을 받고 서울로 올라가다가 병이 나서 사직 상소를 올리고 다시 도산으로 내려온바 있다.
제2수
나를 위한 공부는 모름지기 극기 수양을 따라가고
마음 지키는 길은 오직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구함에 있으니
우리들 가운데 누가 이 뜻을 모를 것인가 마는
어찌하여 참다운 삶을 위해 힘쓰지 않는가.
爲己須從克己修 위기수종극기수
存心惟在放心求 존심유재방심구
吾儕孰不知斯意 오제속불지사의
胡奈眞知太不侔 호나진지태불모
제2수는 유학자는 모름지기 참다운 삶을 위해 극기복례하라는 권고 같다. 극기복례 克己復禮! 이는 공자 사상의 핵심인 인 仁을 추구하는 방법으로, 사리사욕을 극복하여 예를 회복한다는 뜻이다.
원래 이 말은 <논어>에서 공자의 수제자인 안연 顔淵이 공자에게 인에 대해 물었을 때, 공자가 대답한 말이지만, <춘추좌씨전>을 보면 공자가 이 말을 고어(古語)로 인용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공자 이전부터 전해내려 온 말인 듯하다.
이에 대해 주희(朱熹)는 "극기는 일신의 사욕을 극복하는 것이요, 복례는 천리(天理)의 절문(節文)으로 돌아가는 것이다"고 하여, 인간의 존재를 곧 천리로 보는 성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이 말은 인간 본연의 모습을 회복한다는 의미이다. 즉 극기복례는 성리학에서 인간의 올바른 주체를 확립하는 방법으로 제시된 인욕을 막고 천리를 보존한다.(遏人欲存天理)는 구조를 표현하고 있으며, 이 양자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닌 극기가 곧 복례이며 인욕을 억제하는 것이 곧 천리를 보존하는 것이다.
이어서 제3수를 읽어 보자
제3수
한 세상에 하늘은 영재를 몇 명이나 낳는가.
이익과 명예는 바다와 같아 그릇될 까 두렵네.
만일, 설 자리 알아 내 할 일을 구하려면
운곡 雲谷(주자)의 문하에서 참 마음을 쌓아야 한다오.
一世天生幾俊英 일세천생기준영
利名如海誤담驚 이명여해오담경
倘知立脚求吾事 상지입각구오사
雲谷門庭要積誠 운곡문정요적성
제3수는 유학자는 모름지기 주자의 문하에서 참 마음을 쌓으라는 말이다. 운곡(雲谷)은 주희(朱熹 : 1130-1200)의 호이다.
운곡은 중국 복건성 건양현 서쪽에 있는 지명인데, 원래 이름은 노봉산이었지만 주자가 1170년에 운곡이라 개명하고 그 아래에 운곡초당을 1170년부터 1175년 6년간에 걸쳐 지었다.
주희는 공자, 맹자 이후에 쇠락한 유학을 송나라 때 다시 일으킨 자로서, 보통 주자라고 부르며 주자학의 창시자요, 성리학의 원조이다.
주희의 자는 원회(元晦)· 중회(仲晦), 호는 회암(晦庵)·회옹(晦翁)·운곡노인(雲谷老人) · 둔옹(遯翁)으로 호가 여러 개이다.
주희의 학문과 사상은 100권에 달하는 <주자대전>에 남아 있으며, 그는 필생으로 논어 ․ 맹자 ․ 대학 ․ 중용 등 사서를 해설하는 주석서인 <사서집주>를 펴내어 유학의 르네상스를 주도하였다.
여기에서 주희의 사위 황간이 지은 주희의 행장 한 구절을 인용하여 보자.
주나라 때부터 도를 전하는 책임을 지고 그 정통을 얻은 사람은 몇 사람에 불과하며 능히 그 도를 세상에 분명히 드러낸 사람은 한 둘 뿐이다. 공자 이후로 증자, 자사가 그 은미한 도를 계승하였고, 맹자에 이르러 비로소 밝게 드러났다. 맹자 이후에는 주자(周子: 周敦頤) 정자(程子: 程顥와 程頤) 장자(張子:張載)가 오래도록 끊어진 통서를 이었고, 선생(주희)에 이르러 비로소 밝게 드러났다.
제4수
아득히 제멋대로 달려온 나의 반 평생이여.
대롱으로 하늘을 엿보듯 주자(考亭)를 배웠으나
늙고 병들어 실수 많음을 몹시 부끄러워했는데
죽천, 그대의 도움으로 다시 광명을 얻었다오.
茫茫胡走半吾生 망망호주반오생
一管窺天得考亭 일관규천득고정
老病極慙多失墜 노병극참다실추
待君提挈更恢明 대군제설경회명
제4수는 퇴계가 죽천과 이별의 아쉬움을 표현한 시이다. ‘죽천, 그대의 도움으로 다시 광명을 얻었다오.’라는 구절은 죽천을 한껏 추켜세운 표현인데, 퇴계는 제자들에게 언제나 겸양, 겸손하게 대하였다. 겸양지덕.
한편 고정 考亭은 주희의 호이다. 고정은 복건성 건양현에 있는 마을 이름이다. 주희는 1192년에 이곳에 집을 지고 살았으며 고정서원을 세웠다.
제5수
일월의 찬 냇물에 뜻이 더욱 굳어지니
고향에 돌아가서도 이 뜻을 바꾸지나 말게나.
달콤한 복숭아를 날려 보낼 수 없지만
귀중한 밝은 구슬은 단지 연못에 잠겨 있다네.
日月寒溪意更堅 일월한계의경견
歸歟此志莫留遷 귀여차지막류천
但能不見甛桃颺 단능불견첨도양
無價明珠只在淵 무가명주지재연
마지막 수는 퇴계가 죽천에게 당부하는 말이다. 학문에 더욱 정진하기를 부탁하는 글귀이다. 귀중한 구슬은 연못에 잠겨 있다고 한 뜻은 세상에서 자기를 알아주지 않아도 더욱 학습하고 정진하면 시간이 지나면 알아주게 된다는 의미 같다.
퇴계 이황이 지금도 존경받는 이유는 멘토와 겸양이다. 368명이나 제자들 한사람 한 사람에게 그 사람에 알맞은 말씀과 편지로서 학업에 정진하도록 하여 퇴계가 진정한 스승임을 느끼도록 하였다.
퇴계가 제자와 이별 하면서 지어준 이별시는 죽천만이 아니다. <도산잡영>에도 정자 정탁과 정자 오건에게 준 이별 시가 있다.
특히 오건에게 준 이별시 첫머리도 ‘운곡의 주자가 남긴 글, 백 세대의 스승이라.’로 시작하고 있어 퇴계의 주자에 대한 심취는 구석구석에 남아 있다.
그런데 퇴계의 이별시는 보성군 겸백면 사곡리에 있는 화산재 마루에 걸려 있다. 화산재는 죽천의 재실이다. 마루 위에 한시로 적혀 있는 퇴계의 이별시 편액이 붙어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아무 설명이 없는 점이다. 편액 아래에 ‘퇴계가 죽천에게 준 이별 시’라는 간단한 설명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