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벽과 기암괴석의 조화 오봉산
평지와 바닷가에서 바라보는 산의 경관이 특출한 곳으로 다섯 봉우리의 기암괴석이 있다. 산정에 올라서면 득량만과 고흥반도의 모습이 수채화처럼 펼쳐진 이 산은 높이가 324m이며, 해발 337m의 칼바위는 새의 부리 같기도 하고 날카로운 칼날을 새워놓고 병풍을 펼쳐 놓은 듯하다. 이곳에서 신라의 고승 원효대가사 수도했다고 전한다.
벌교읍에서 2번국도를 타고 보성읍으로 향하여 득량면으로 들어서면 도로 왼쪽으로 너른 벌판이 펼쳐지고, 그 끝에 우뚝 솟은 산이 두개 보인다. 예당벌과 오봉산이랑 지명이 붙어있는 산들인데, 이곳 사람들은 왼쪽은 오봉산, 오른쪽은 작은 오봉산(284.2m)라 부르고 있다. 다섯 개의 위성봉을 거느리고 있는 작은오봉산은 가까이 가면 정상부 오른쪽에 바위가 삐죽 튀어나와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책상바위라 불리는 바위로 주민들은 이 바위를 보고 성장한 덕분에 인재가 많이 나왔다 자랑하곤 한다. 특히 철도길에서 바라보는 자라바위는 보는 방향에 따라 모양이 특이하다. 오봉산은 한민족의 아픔이 서려 있는 산이다. 1949년 10월초 빨치산 보성지구부대는 보성경찰서를 습격하려다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경찰의 매복에 걸려 격전 끝에 100여 명이 군경저지선을 뚫고 오봉산으로 도망쳤으나 뒤쫓아 온 군인, 경찰들에게 다시 발각돼 격렬한 전투를 벌였고 결국 빨치산 잔당들은 30여 명의 사상자를 낸 뒤에서야 오봉산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전해진다.
오봉산 구들장 탐방로
구들장밭
구들장밭
구들장밭
돌탑
오봉산 구들장길 및 용추폭포
구들장길
구들장길
구들장길
용추폭포
오봉산 해평호수 수변산책길
수변산책길(생태탐방로)
수변산책길(생태탐방로)
수변산책길(생태탐방로)
수변산책길(생태탐방로)
오봉산 우마차길 스토리
오봉산에는 널돌들이 흔해 오래전부터 구들을 치는 이른바 ‘방(房)돌’을 거기서 가져다 구들을 앉혔다고 했다. 웬만한 아궁이의 불길에도 ‘튀지 않는다’는 오봉산 구들장은 예부터 명성이 자자해 인근 주민들은 집을 새로 지을 때면 오봉산 널돌을 깨서 지게로 져 날랐다. 돌을 캐다가 그저 제 집의 구들을 놓았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일제강점기에 전라선이 놓이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열차는 득량면 소재지까지 들어왔다. 득량역에서 주로 가져간 화물은 돌덩이들 이었다. 오봉산 구들돌이 좋다는 소문이 전국으로 퍼지면서 서울이며 부산 등지에서 주문이 쇄도했고, 그 물량을 대기 위해 마을 주민들은 오봉산을 오르내리며 채석에 나섰다. 말이 채석이지 돌을 캐내는건 고되고 끔찍한 노동이었다고 한다. 오봉산 아랫마을에 거주하는 이춘선(72세) 씨의 증언에 의하면 “징그럽게 배고픈 세상이었지. 마을에서 먹고살 만한 한두 집이 있으면 거기서 품을 팔아 연명했어. 어쩌다 일을 얻어서 종일 뼈 빠지게 일해도 남자는 쌀 한 되, 여자는 쌀 반 되를 받으면 다행이었지. 그런 판에 매일 할 수 있는 돌 캐는 일이 아무리 고된들 마다했겠어.”라며, 구들장은 노출된 바위에서 뜯어내는 게 아니라 땅속에 묻힌 걸 쪼개서 캤다고 한다. 드러난 바위를 구들장으로 쓰면 불을 맞아 곧 터져 버렸지만 흙에 깊이 묻힌 건 불을 견뎠기 때문이다. 땅을 파고 정으로 바위를 결대로 쪼개 뜯어내는 것도 고된 노역이었지만, 그 돌을 산 아래까지 나르는 일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가파른 산길을 ‘갈 지(之)자’로 뉘어서 거의 팔부능선까지 소달구지를 끌고 올라가 사방 6자(약 1.8m)짜리 구들돌 두 개를 싣고 내려왔는데, 가파른 비탈을 내려올 때면 다리가 다 후들거렸다고 했다. 달구지는 수시로 구르고 엎어졌고 소도 사람도 다치기 일쑤였다. 하지만 거기에 생계를 의지한 이들은 막걸리 한 사발로 배를 채우고는 힘에 부친 노동을 온몸으로 견뎠다. 오봉산에 간다는 것은 1970년대 말까지 계속됐다는 그 고단하고 위태로웠던 자취를 따라 오르는 일이다. 비탈진 산길은 한세대 이전 가난했던 가장들이 고된 노동을 생계와 맞바꾼 길이었다.
산행 코스 안내
- 득량남초등학교~칼바위~정상 (6.1km, 약 3시간 5분 소요)
- 용추교~칼바위~정상 (5.7km, 약 3시간 소요)
- 용추교~절터~칼바위~정상 (5.7km, 약 3시간 소요)
- 용추교~절터~용추폭포~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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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바위
- 위치 : 작은오봉산 정상
- 오봉산에 있는 바위로 마을 주민들은 이 바위를 보고 성장한 덕분에 인재가 많이 나왔다고 하여 책상바위라고 이름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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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바위
- 위치 : 오봉산 정상
- 통일신라 때 고승 원효대사가 수도터로 삼고 불도를 닦았다는 전설의 기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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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산 돌탑
산길 곳곳에 형성된 너덜지대엔 많은 돌들이 쌓여 있다. 다른 산의 너덜과는 모양새가 다르게 모두가 널찍하고 반듯반듯하다. 한때 가난한 시절에 이곳 주민들은 이 돌을 구들장으로 팔아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지금 그 돌들은 돌탑이 되어 오봉산을 찾는 등산객들에게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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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새바위
득량면 오봉산에 있는 바위로 돌이나 바위에 붙어 자라는 굴을 따고 그 안의 속을 긁어내는 데 T는 연장인 조새처럼 생겼다고 하여 조새바위라고 불린다. 일명 황새바우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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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평리 석장승
- 위치 : 보성군 득량면 해평리 33
- 문화재자료 제 55호로 해평리 조양(海坪里 朝陽)마을 초입 노변 좌우에 나란히 서 있다. 옆에는 수령 400년으로 추정되는 당산나무가 있다. 우측 높은 곳의 돌담사이로 서 있는 것이 여상(女像)인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이고, 길건너 낮은 쪽 상석 위에 낮게 선 것이 「하원주장군(下元周將軍)」으로 남상(男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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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골마을
강골은 강동(江洞)으로 부르기도 한다. 11세기 중엽 양천허씨가 처음 터를 잡은 뒤, 원주이씨를 거쳐 16세기 말에 광주이씨(廣州李氏)가 들어와 정착하면서 광주이씨 집성촌이 되었다. 지금 남아 있는 가옥의 대부분은 19세기 이후 광주이씨 집안에서 지은 것들이다. 마을은 조선 후기의 전통가옥 30여 채가 오봉산(五峰山)을 바라보면서 작은 골짜기 안에 접시 꼴로 똬리를 틀고 앉은 모습을 하고 있다. 가옥과 가옥 사이에는 담쟁이덩굴과 대나무로 뒤덮인 돌담길이 이어지면서 한국의 전형적인 씨족마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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