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진다의식이 다례의식으로 발전
유교와 차의 관계
조선시대에는 불교문화와 함께 도입된 차가 성리학의 도입과 중세를 부과하여 불교가 힘을 잃으면서 다도(茶道)가 다소 쇠퇴하였으나, 사원을 중심으로 차 문화의 전통이 이어졌다. 조선 초기에는 조정과 왕실제도나 의례에서 고려의 음다풍속을 이어왔으나 차 대신 술이 사용되면서 임진왜란 이후 차 문화가 급격히 쇠퇴, 차의 품격도 떨어졌다. 또한 차 산지 백성들에 대한 다세 부과로 차 생산지가 줄고 차에 대한 거부감이 심화되어 기호 음료로서 차가 정착되지 못했다. 그러나 사신의 왕래 시에는 항상 다례를 행하였으며, 선승(禪僧)이나 선비들은 물론 궁궐에서도 다례의식을 행하였고, 포청과 의금부에는 다모(茶母)를 두는 등 차의 명맥을 이어나갔다.
조선시대 음다풍속
이 시기에 많은 시인들이 등장해 다시를 발표했지만, 고려시대에 비해 차 생활이 많이 쇠퇴해버린 것이 사실이다. 부처에게 차를 올리는 공다례는 연등회와 팔관회에서 행해졌으나 그 규모나 내용면에서 많이 축소되었고, 사원에서의 다례나 일반 차 생활도 많이 위축되었다. 한편 문인들은 개인적으로나 모임을 통해 소박하고 운치있게 다회를 운영해 나갔다. 이때 다인들은 청빈과 안일을 즐거움 삼아 무욕의 삶을 살았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김시습이다. 그는 차를 기르기도 하며 따기도 하고 차를 달이기도 한 다인이며 시인이었다.
조선시대 여성들과 다례
조선시대에는 여성들이 차를 끓여 올린 경우가 많았다. 궁궐의 차 심부름도 궁녀가 담당했고, 지방관청에는 다모가 있어 관리에게 차를 끓여주었고, 기생들도 다례를 베푸는 일을 하였다. 세종 때는 처녀를 뽑아 사신들에게 다례를 행하기도 했다. 왕실에서는 왕이 주다례를 행한 후에 대비가 따로 다례를 행한 경우도 있었다. 여성 문인들도 거문고를 타며 차 마시고 많은 시를 지은 기록이 남아 있다. 영수합 서씨(1753∼1823)는 훌륭한 다인이며, 그의 다시가 여러 편 전해진다.
조선시대 차의 종류
- 토산차 : 작설차(雀舌茶)ㆍ죽로차(竹露茶) 보림차(寶林茶)ㆍ황차(黃茶) 황금차(黃金茶)ㆍ뇌소차(雷笑茶) 선차(仙茶)ㆍ노아차(露芽茶) 소차(小茶)ㆍ용척다병(龍脊茶餠)
- 대용차 : 백산차(白山茶)ㆍ해아차(孩兒茶)ㆍ국화차(菊花茶)ㆍ인삼차(人蔘茶) 천궁차(川芎茶)ㆍ구기차(拘杞茶)ㆍ기국차(杞菊茶)ㆍ우유차(牛乳茶) 오과차(五果茶)ㆍ송절차(松節茶)ㆍ상지차(桑枝茶)ㆍ귤피차(橘皮茶) 약재로 만든 차(생강차, 모과차, 유자차, 감잎차, 당귀차, 두충차, 결명자차, 보리차, 옥수수차 등)
- 수입차 : 용단차(龍團茶)ㆍ봉단차(鳳團茶) 건안차(建安茶)ㆍ용정차(龍井茶) 보이차(普?茶)ㆍ지순차(地荀茶) 황차(黃茶)ㆍ향편차(香片茶)
세계적인 문화유산, 백자
다구의 발달은 당시 역사적인 배경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고려청자 다기가 조선에 와서는 백자로 변하게 되는데, 이는 차의 빛깔에 따른 변화라기보다는 그 시대의 종교, 생활습관, 경제 사정 등의 영향을 받았다. 백자로 만든 다기는 은은하고 안정되고 우아하며 보수적인 색감을 띄고 있어 한국적 아름다움을 잘 표현하고 있다. 문양장식 방법에 따라 순백자와 상감백자, 청화백자, 철화백자, 붉은 색 또는 자주색을 띠는 진사백자, 인물ㆍ동물ㆍ식물ㆍ건물 등 갖가지 형상을 본떠 만든 상형백자로 나뉜다.
오기(吳器)다완과 진사청자
제사 때 사용되는 목기처럼 굽 부분이 밖으로 벌어진 특징을 갖는 오기다완 형태는 앉음새가 안정되고 당당해 조선시대 풍치가 느껴진다. 오기다완이 제작된 시기는 정호다완이나 분청다완과 동일한 조선시대 중기로, 일본 무로마치 시대 후반에 다인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던 작품이다. 한편 진사청자는 녹색과 붉은 색이 불길에 의해서 자연적으로 나타나는 것인데, 현존하는 최고의 진사는 12세기의 것으로 청자진사당초문완(靑磁辰砂唐草紋碗)이며 영국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다인열전
조선시대에는 잎차의 애용과 함께 백자로 만든 다구들이 유행했다. 다관에서 우려낸 찻물은 연둣빛이기 때문에 빛깔이 조화되는 백자의 다종에 따라서 마셨으나 근본적인 차 마시는 문화는 많이 쇠퇴하였다. 그러나 조선 말엽 정약용, 김정희, 초의 의순 등을 중심으로 조선시대 차 문화의 중흥기가 있었다. 또한 조선조 시대를 대표하는 명승 서산대사는 "만국의 도성(都城)은 개미집과 같고 천가(天家)의 호걸들은 하루살이와 같도다. 밝은 달, 흰구름을 벗한 다회(茶會) 자리에 차솥 물 끓는 소리 하염없이 들리네" 라는 유명한 다시에서 밝은 달과 흰 구름을 벗한 자신의 청수(淸修)한 모습과 해탈의 경지에 이른 청허(淸虛)한 마음을 표현하였다.
다세는 무명 30필
조선시대 다세제도는 고려시대의 제도를 그대로 계승하였으나 차츰 차 문화 발전의 저해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차 산지는 다세 부과 지역이며 인접한 지역도 부과 대상이 되었고 차의 가격은 매우 높았다. 일례로 거창의 다세를 보면 거창 군민들이 무명 30필을 주고 차 한 말과 교환 대납을 했으나 거창은 차 산지가 아니었다. 즉 이는 다세를 받기 위해 시정한 조선관리들의 가혹함이 단적으로 증명된 것이다.
차 문화의 바탕 고려청자
일반 백성들도 차를 마셨을까?
고려의 차 문화가 조선시대에 와서 쇠퇴하는 현상을 보인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차 문화가 급격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마지막 왕조인 이 시대에도 왕실에서는 고려의 다례의식을 계승한 차 문화가 존재했고, 민간에서는 차를 제사 및 접대용이나 혹은 약용으로 썼다. 민중 속으로 뿌리내려 면면히 이어져와 오늘날 차 문화의 또 다른 뿌리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茶詩), 차 민요 등을 통해 조선의 차 생활을 엿볼 수 있는데, 다분히 귀족적인 고려 차에서 소박한 민중 차로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다도정신
조선시대의 다도정신은 서산대사의 다시와 초의 의순의『동다송』,『다신전』등에서 엿볼 수 있다. 우선 서산대사는 그의 시에서 청허(淸虛)ㆍ다선일여(茶禪一如) 정신을 차와 연계하였고, 초의 의순은『동다송』29송에서 다도정신의 중화(中和)ㆍ중정(中正)을 말하였다. 이 밖에 조선시대의 다도정신을 종합 분석해볼 때 청허(淸虛)ㆍ화정(和正)ㆍ중화(中和)ㆍ중정(中正)으로 집약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조선시대의 다
조선시대 찻잔은 고려 때와 별 차이가 없다. 아랫부분보다 윗부분이 넓어 잎차를 마실 때 많이 사용되었다. 다종(茶鍾)은 향이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잔뚜껑이 있었다. 다구는 굽이 높고 아래위가 같은 의식용 다기가 사용되었으며, 그 외에 차 보시기(茶甫臾), 다배(茶杯), 귓대그릇, 돌솥다관, 화로와 풍로 등이 있었다.
숭늉을 즐긴 조선인들
조선 초기만 해도 평민사회에서 집안이 망해 조상 제사에 다례(茶禮) 올릴 차 한잔 없다는 뜻으로, 누구네 집에 차 항아리가 비었다는 말이 전해온다. 일반 가정의 제례에서도 제주(祭酒)로 청주를 많이 사용하였으며, 일상생활에 담배와 술 같은 기호품의 성행과 한국인의 좋은 생수였던 숭늉을 많이 마시는 등 한국인의 생활습관의 변화로 인하여 차 문화가 쇠퇴하였다. 또한 조선 후기 지방 관리들의 다공(茶貢)에 대한 지나친 수탈도 쇠퇴의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