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화랑들은 왜 차를 마셨을까?
신라고승들의 다선일체(茶禪一體)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한지 1백년이 지난 신라 경덕왕(景德王, 742∼765) 때는 신라 천년의 역사 중 가장 안정된 시기였다. 특히 전쟁 없는 평화의 시대와 더불어 외국과의 교역으로 산업이 발전하여 문물이 풍요로웠는데, 그 영향에 따라 차 문화도 크게 발전, 차의 생산뿐만 아니라 신라 고유의 정신문화와 학문도 크게 발전하였다. 특히 신라에 융성했던 불교문화와 차의 관계는 충담사와 기파랑, 월명대사, 혜소, 진각국사 등 고승의 수도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벗이 되었다. 한편 『삼국유사』에는 당시 신라인들이 자주 마시던 차는 말차(沫茶), 즉 잎차를 가루로 만든 차라고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화랑정신과 다도
신라인들은 일정한 의식에 구애받지 않고 일상 생활 속에서 차를 사랑하였다. 특히 차는 잠을 쫓고 정신을 맑게 할뿐만 아니라 명상에 적합한 것으로 알려져 수도하는 승려, 수련하는 화랑(花郞 : 귀족)과 낭도(郎徒 : 평민)가 애음하였으며, 야외 중심의 음다풍속도 성행하였다. 신라의 음다풍속을 살펴볼 때, 주류를 이루는 계층은 화랑으로 이들의 다도정신은 화ㆍ정ㆍ청(和ㆍ靜ㆍ淸)으로 대표된다. 이들은 유(儒)ㆍ불(佛)ㆍ선(仙)의 정신을 받들어 산천에서 심신을 단련하며, 차(茶)와 더불어 수련하였다. 신라의 대표적인 국선(國仙)이자 차의 달인으로 알려진 영랑(永郞)ㆍ술랑(述郞)ㆍ남랑(南郞)ㆍ안상(安祥), 이들 사선(四仙)의 풍류도의 흔적으로 차를 달여 마시던 유물과 유적지 등 명승지를 유람하며 수행을 한 그들의 자취는 지금도 경치 좋은 동해안 곳곳에 남아 있다. 화랑의 정신과 덕목 그리고 세속오계, 자연과 조화하여 멋과 인격을 다듬은 풍류 차 생활은 신라인의 자랑일뿐 아니라, 5천년 한국 역사에 찬란하게 빛나는 정신문화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차 이야기가 적힌 고전 문헌
제목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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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권2 경덕왕 충담사조 | 신라 차의 개조(開祖) 충담사의 헌다 의식 |
삼국유사 권2 가락국기(駕洛國記) | 수로왕의 헌다 의식 |
최치원의 계원필경(桂苑筆耕) 권18 | 사탐청요전장(謝探靑料錢狀) |
이규보의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 | 해동(海東)의 등불 원효대사 |
이곡의 동유기(東遊記) | 신라의 화랑도와 다도와의 관계(四仙의 다구) |
삼국사기 신라본기 흥덕왕 3년조 | 차 종자의 유입 |
신라 유적에서 드러난 차 풍습
석굴암의 문수보살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웠던 경덕왕 10년(751년) 때의 재상 김대성(金大成)은 전생의 부모님을 위하여 토함산 기슭에 석굴암(石窟庵)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동양 불교 예술의 극치로 평가받는 석굴암의 구조는 원형 돔 안에 위치한 중앙의 본존불을 중심으로 십대제자, 사천왕, 세보살상 등이 석가모니불을 둥글게 둘러싸고 있다. 석가모니불 오른쪽 제석천 옆에는 찻잔을 든 문수보살상이 있다. 문수보살은 석가모니불의 깨달음의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로 중앙의 석가모니 부처님에게 다소곳이 다가가서 차를 올리려는 동작을 하고 서 있다.
자비심과 풍류도의 상징
입체 양각으로 조성된 문수보살상은 오른손에 찻잔을 들고 가슴 상단으로 향하고 있는데 마치 차의 빛깔, 향기, 기운을 먼저 감별하고서 올리려는 듯 눈초리가 찻잔에 내려와 있으며, 왼손은 내려 가볍게 옷자락을 밀치고 있는데 부드럽게 흐르는 신체와 천의 자락에는 우아한 율동이 흘러넘쳐 문수보살의 중생교화에 대한 자비심이 엿보인다. 부처님께 차 공양을 올리는 모습을 하고 있는 문수보살상은 석굴암에서만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이것은 신라 풍류도(風流道)의 예술성과 다도정신이 낳은 걸작으로 차를 달여 부처님께 올리려는 숭고한 신앙정신을 보여준다.
법주사 희견보살 찻잔
속리산 법주사 희견보살상은 머리에 커다란 찻잔을 이고 있는데 마치 시골 여인네가 머리에 물동이를 이고 있는 모습과 흡사하다. 신라 33대 성덕왕 19년에 조성된 것으로 희견보살은 미륵부처님께 차 공양을 올리는 공양상으로 찻잔과 찻잔 받침을 머리에 이고 있는 것이다.
신라의 다구
석부(石釜)는 진감국사가 차를 달일 때 쓴 용기로 돌솥을 말한다. 금정(金鼎)은 최치원의 글에서 등장하는데 정은 돌이나 쇠로 만든 세발솥이다. 그 외 충담스님이 어깨에 지고 있었다는 다구통으로, 벗나무 껍질로 만든 앵통(櫻筒)이나 대나무로 쪄서 만든 궤(삼태기)도 있었다. ※ 원효의 화쟁지화 불교계의 해동보살일 뿐 아니라 차와 불교의 화합을 이루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는 원효의 중심 다도 철학은 화쟁지화. 그는 『해동기신론별기』에서 쟁(諍) 사상을 "그윽하지만 만 가지 형상 밖에 벗어나지 않으며 고요하지만 오히려 백각의 이론 속에 있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즉 쟁이란 근본 뿌리로 돌아가는 것이며, 깨달음을 일컫는다. 따라서 원효의 불교사상은 바로 화쟁이며, 다선일체관을 지닌 원효의 다도정신 역시 화쟁과 통한다.
신라인들의 음다생활
충담사의 헌다 의식
신라 차를 개조(開祖)라고 일컬어지는 충담사가 미륵세존께 헌다한 기록은 『삼국유사』권2 경덕왕 충담사에 나온다. 충담사는 매년 3월 삼짇날과 9월 중구날이면 남산 삼화령(三花嶺)의 미륵세존께 차 공양을 올렸다고 한다. 이러한 헌다 의식은 신라 때 유행하던 풍속이다. 충담선사가 헌다 공양을 하던 의식과 절차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 수 없지만 간단한 다구를 걸망 속에 넣어 메고 다녔다는 기록으로 보아 야외에서 간편하게 차를 달일 수 있을 정도로 차가 신라인들의 일상생활에 가까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다인열전
- 등신불이 된 지장법사 - 지장법사는 중국 구월산에서 생산되는 금지차(金地茶)를 국내에 가지고 들어와 심어 가꾸었다.
- 신선이 된 최치원 - 최치원은 중국 유학시절 본국의 사신이 다녀가는 배 편을 만나면 부모님께 차와 약을 사서 서신과 함께 보냈다고 한다. 『계원필경』권18
- 범패의 선구자 - 진감선사는 지인들에게 선물 받은 중국 차를 덩어리째 그대로 돌솥에 달여 마셨다는 기록이 쌍계사 진감국사비(국보 47호)에 전해진다.
- 신라 화랑의 스승, 원광법사 - 화랑들을 위해 세속오계를 설법한 원광법사는 차의 명산지인 호구산(虎丘山)에서 참선 수행을 하였으며, 차 생활도 익혔다.
- 화랑들의 꽃, 사선(四仙) - 사선(四仙)이란 신라의 대표적인 화랑인 영랑, 술랑, 남랑, 안상을 말한다. 이들은 강릉 한송정 밑에 다천(茶泉), 돌솥(石釜), 돌절구(石臼)를 놓고 선유하며 차를 달여 마셨다.
- 해상왕 장보고 - 중국의 산동반도에 신라방(新羅房)을 세우고 많은 신라승들과 신라인들이 자연스럽게 차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입당구법순례기』